감상 게시판

게시일시: 2001/01/29 오후 5:58
Email: veritas5@hotmail.com   게시자: 20대말년의만화팬
제목: 서사적 배경 속에 녹아드는 우리네 恨의 정서

제가 김혜린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접한건 테르미도르(열월)- 아마 보물섬이라는 잡지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였습니다.  그 이후 단행본이 나오기만 하면 한 권씩 사서 모으기 시작한게 어언 13년...

주변에 순정만화 보는 놈들이 없어서 약간 외로울 때도 있지만(^^)- 만화 좋아하는 놈들은 많은데 이상한 선입견들을 갖고 있어서리....- 뭐 남자들도 선생님 작품 좋아하는 사람들은 꽤 있습니다.  (저는 골수분자)

제가 김혜린 선생님의 작품을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되는건 결코 가볍지 않은 시대 분위기를 그려나감에도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쩌면 그리도 완벽하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결국 작업이 늦어지시는 건 어쩔 수 없지만서도..)

시대의 격정, 시대의 아픔, 시대의 변화와 맞춰 사람이 사는 모습은 당연히 바뀌어 나갑니다.  그런데 김혜린 선생님 이외에는 이런 전개를 제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 현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작업을 하는 장인의 입장에서 이런 시대의 모습을 중심적으로 서술하게 되면 그 안의 캐릭터는 제한된 목적의식을 갖고 행동하게 그려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물론 김혜린 선생님의 캐릭터는 사실 광야와 단편 몇작품을 제외한 메이저 작품들에서는 계급의식이라는 중세 이데올로기가  그 전제가 되어 있긴 합니다만... 시대의 모습과 캐릭터를 한덩어리로 뭉뚱그리기 위해서는 不可缺한 사항이기도 합니다.

약간 부연이 길어졌는데.. 전 김혜린 선생님의 캐릭터는 대표적으로 恨의 정서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시대의 모습은 이 정서를 제대로 표현해 내기 위한 넓은 캔버스가 아닐까 하고 말이죠... 일부 서양의 인문과학자들이 일본을 많이 연구한 탓에 그들의 恩(온)의 정서를 동양의 미덕이라 소개한 글들(논문도 그런 것들이 많습니다.)을 보면 .. 약간 울화가 치밉니다.

우리네 한의 정서는 원한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루지 못한 것들을 안타까워 하는 그런 심정이야 사실 동서고금을 통해 누구나 갖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한의 정서는 세대를 건너 계속해서 이어지지만 그 본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어 집니다. 원한과 복수라는 등식은 인내와 용서로 , 하지만 존재 했던 사실 만큼은 가슴속에 수줍이 묻어두는 형식으로 말이죠.. 김혜린 선생님의 테르미도르, 비천무, 불의 검 등의 주옥과 같은 작품들에서는 항시 2세대 이상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대의 모습이 변화하고 사람이 사는 모습도 변화하고 그 안에서 지키고 있던 각각의 심정도 함께 변화됩니다.  하지만 시대의 아픔으로 상징되는 비극적인 사실 들 만큼은 변화하지 않고 각각의 캐릭터 가슴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그려지게 되죠...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어려운 정서를 만화로 표현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분이 김혜린 선생님 이라 생각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작품이 늦게 나오든 말든 별 상관 않습니다. (한 번 나오면 50번 이상을 읽는데 ..) 특히 이모씨 같이 한국을 대표한다 자처하는 만화가가 지금 내놓고 있는 작품같지 않은 것들을 보면... 그냥 성질만 ..납니다.

특히 영화로 만들어진 비천무!!!!!! 그 감독.. 잡아서 아작을 내주고 싶을 정도로 작품을 엉망진창으로 훼손시켜 놨습니다. (죄송합니다. 심한 말써서..)

또 잡담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누가 뭐래도 가장 한국적인 만화가는 김혜린 선생님 한 분 뿐입니다. (아직까지는)부디 앞으로도 정진하시고.. 건강하셔서 .. 작품보면서 계속 눈물 펑펑 흘리게 만들어주시길.. 마음 속으로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