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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시: 1999/04/21 오후 9:52
게시자: 이준희
제목: 비천무를 다시 읽으면서
이 글은 하이텔의 순정만화사랑에 올렸던 감상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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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무를 다시 읽으면서
김혜린의 만화 중에서 비천무는 평가가 엇갈리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순정만화와는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무협`이라는 소재를 선택한 만큼 보는 각도도 여러가지가
있을 게다. 하지만 나의 평가를 말하자면 이건 대단히
뛰어난 만화라는 거다.
비천무라는 작품이 가지는 미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순정만화라는 장르의 범위를 크게 넓혔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무협이라는 소재를 순정만화에
접목했다는 점, 주로 중세의 유럽에 국한되던 시대와
장소배경을 동양으로 옮겨왔다는 점, 원말 명초의 역사적
사실에다 허구의 스토리를 잘 엮어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는데, 내가 과문해서인지는 몰라도 김혜린
이전에 이런 시도를 한 사람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물론 80년대의 대가들 -- 강경옥, 신일숙, 황미나, 김진 --
이 모두 이런 점에서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김진을 제외한 세 사람은 김혜린에 비한다면 구식(?)
순정만화에 더 가깝다고 본다. (김진에 대해선 내가 많이
읽어보질 않아 잘 모른다. 솔직히 잘 이해가 안되는
작가이다)
또 똑같이 순정만화의 지평을 넓혔다고 해도 그 새로운
시도가 작품 전체에서 얼마나 빛을 발휘하는가를 따져
봐야 한다. 가령 강경옥의 `별빛속에`를 위시한 SF 물에서
보이는 메카닉의 조악함은 작품 전체의 우수성과는 별개로
눈에 거슬리는 점이다. 똑같이 무협과 순정의 결합이라고
하지만 황미나의 `취접냉월` 은 `비천무`와 비교하기엔
무리이다.
비천무는 읽는 사람에 따라 참 여러 가지로 받아들여진다.
무협지에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 참
색다른 무협지라고 생각할 것이고, 순정만화의 본질은
역시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같이 죽는 연인들을 보면서 눈물을
쏟을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역시 원말 명초의 역사에 무협이라는
요소를 기가막히게 버무려낸 작가의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은 사실 `비천무`를 순정이나 무협보다는
역사만화의 장르에 포함시키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무협소설계에서 신필이라는 칭호를 듣고 있는 김용의
`의천도룡기` (영웅문 3부) 도 비천무와 시대 배경이
같다. 그러나 의천도룡기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는
전통적인 무협지에서 볼 수 있는 허구의 세계이다.
실제 중국 역사의 무당파나 명교, 소림사는 소설에
나오는 것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굳이 비슷한 예를
들자면 1930년대 만주의 군벌 같은 것이었을까.
이에 비해 `비천무`에 등장하는 무협의 세계는 훨씬
더 현실감이 있다. 청진방이나 남궁세가 같은 무림방파가
생존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우량, 장사성 등의 군벌과
손을 잡는다는 설정은 매우 그럴듯 하다.
무공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이다. 비천십이신기가 당대
최고의 검술이긴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음모 앞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기껏해야 자객술로 쓰일
뿐이다. 이 점에선 켄신과 좋은 대조가 된다. 정말 칼
한자루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가?
비천무에도 아쉬운 구석은 있다. 김혜린 만화의
주인공들은 너무 완벽하다. 가령 유리핀 멤피스는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그는 항상
옳았고, 항상 완벽했으니까. 유진하나 아사 대로 오면
이들은 고뇌하고 실수도 하지만 그래도 갖은 고문과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굳건한 인간이란 점엔 변함이
없다.
80년대는 전설의 시대, 열사의 시대였다. 권력과의
투쟁에서 수없는 사람들이 박해받고 죽어갔다.
그 와중에 신화도, 영웅도 많이 생겨났다.
그런데 오늘날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떠한가.
전리품에 눈이 멀어 아귀다툼을 벌이는 저 여의도의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은 잊어버리자. 하지만 87년
여름 시청앞으로 몰려나왔던 그 많은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는 걸까?
`비천무`와 동시대를 살았던 그 세대는 이제 배가
나오기 시작하는 아저씨나 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둔
주부가 되었다. 세상을 바꾸기는 고사하고 직장에서
잘리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초라함밖에 남은 게
없다. 그런데 김혜린이란 작가는 아직도 그걸 붙잡고
있는 거다. 그사람은 아직도 그걸 믿고 있는 걸까.
아니면 믿고 싶은 걸까. 궁금한 일이다.
1999. 1. 30.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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