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게시판

게시일시: 1999/05/26 오후 9:20
게시자: 돌베개
제목: 수하이, 네 무덤에 꽃을 던지마.

반갑다, 수하이. 너를 못 본지도 벌써 몇 달이 넘었구나. (`불의 검` 단행
본을 8권이랑 9권을 빼고 모두 - 사정이 있어서 - 내다 버렸거든) 너를 볼
때마다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착잡한 감정을 품곤 한다.

너는 1권에서부터 `나쁜 놈의 시키` 였어. 아라를 붙잡아가려고 할 때부터
말이야.(말이야 바른 말이지 네가 처음 아라를 잡으려고 할 때 아라는 손톱
으로 사정없이 북북 할퀐잖아? 네 얼굴에 손톱 자국이 났을 때 내가 얼마
나 속이 시원했나 모르겠다. - 그땐 단행본을 처음 읽을 때였고, 네가 왜
그렇게 비뚤어진 짓을 하는지 몰랐거든. 그저 처음부터 나쁜 놈의 시키라
서 그렇다고 믿었지 ) 난 그때 너를 단지 힘 세고 덩치 크고 돈도 많고 권
력이 있는 `나쁜 놈`으로만 알았지(옷은 번지르르하게 입고 나왔거든). 서
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갈라 놓는 - 돈과 권력이 있다고! - 놈을 누
가 좋아하겠냐? 그래서 네가 산마로 - 가라한 아사 - 에게 얻어터질 때 속
으로 박수를 쳤지. 결국 너는 아라랑 산마로와 큰마로(아라의 아버지)가 살
던 작은 마을을 부하들 데려와서 다 불태워 버리고, - 1대 1로 싸웠으면 됐
지, 비겁하게 그물을 씌워서 잡냐? 앙? - 아라를 잡아가잖아. 나중에 카르
마키에 약탈혼, 납치혼이 있다는 사실을 8권 끄트머리를 보고 알았지만 말
이야. 나는 1권을 보면서 너를 욕했지. 아라를 남편한테서 갈라 놓고는 강
간하는 꼴도 그렇고, 도저히 좋게 볼 건덕지가 없데. 헌데 좀 더 읽어보니
까 너도 다 까닭이 있어서 그러더라. 너 엄마가 아무르 족이었다며? 그리
고 다른 식구들 다 죽고(: 아마도) 네 엄마는 자기를 납치해온 놈이랑 혼인
해서 살고는 너를 낳았지? 그러다가 못된 왕 온구트에게 띄어서 억지로 왕
의 첩이 되고 말이야. 야장(대장장이) 이었던 아버지는 아내를 뻇기니까 스
스로 목숨을 끊고, 너는 어린 마음에 온구트에게 분노를 품었겠지. "무슨
소리야? 왕이면 왕이지 우리 엄마를 어쨌다고?"하고 소리를 질렀으니까 말
야. 그러니까 네 아버지란 사람은 술독에 빠져서 이랬다지? "수하이, 넌 모
른다. 왕에게 거슬리면 우리 일족은 다 죽는다." 하고. 그 때, 어린날의 너
는 이렇게 외쳤지 : "아버진 비겁해. 술독에 빠져서 죽을 거야!"
너는 그 때 엄마에게 이렇게 외쳤지. : "도망가요, 엄마. 내가 보호해 줄
게. 검은 강 건너편에 엄마의 동족들(:아무르족)이 있댔잖아. 가요-!"
나는 네 엄마가 한 말을 잊을 수가 없더구나.
"..... 카르마키의 여자로 산 엄마를 사람들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 말이 내 가슴을 찌르고 후벼팠다. 남자로서, 사내로서 도저히 고개를 똑
바로 들 수가 없더구나. 그런 너와 네 엄마를 보면서 옛날 임진왜란과 병자
호란때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들이 `더러운 년` 취급을 받고 벌을 받아야
했던 역사가, 1950년 이후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흑인 혼혈아
와 그 어머니들이 떠올라서 목이 메었다. 그들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잡종개" 소리를 지르며 용서(?)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나같은 남자들 이었
기에 말이다. 결국 네 엄마는 왕의 후궁이 되었고, 너는 그때부터 비뚤어졌
지. 나는 그 사실을 안 뒤부터 너를 욕할 수가 없었다. 너 또한 역사가 강
요한 삶을 살았을 뿐이지 처음부터 나쁘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너, 차라
리 그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쳐서 살지 그랬니. 왜 네가 겪은 아픔
을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이 짐지웠냐, 그래? 그래도 너는 자기가 나쁜 놈이
라는 사실을 알더구나. 웬지 나 자신의 비뚤어진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그뒤
로는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나는 네가 카르마키 귀족들에게 "더러운 혼혈
아."라는 비아냥을 들을 때도, 씨다른 동생 바란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욕설
을 퍼붓고 화를 낼 때도(사실 바란 같은 놈은 좀 맞아야 돼. 제 얼굴이랑
신분 가지고 오렌지족이나 재벌 2세처럼 바람을 피우면서 여자들을 울리
고, 아무리 씨가 다르다지만 그래도 형인데 버릇없이 구는 놈이잖아. 그래
서 그 새끼 죽었을 때 눈물 한 방울 안 났어. 잘 죽었다고 생각했지) 난
네 편이었지. 그리고 후궁이 된 어머니가 울거나 화를 낼 때도 묵묵히 듣
고 속으로 넋두리를 하잖아 - `내 아버지가 죽었을 때도 어머니는 그렇게
슬피 울었소?` 하고.

그 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어. 그저 너에게 지지를 보낼 뿐이었
지. 5권에서 네가 온구트를 죽일 때도 나는 네 편이었어. 그런 놈을 왜 단
칼에 편하게 죽이니? 아주 난도질을 해 줘야지. 너는 그래도 어머니한테는
효도 잘 하데. ... 하지만 아라한테는 너무했어. 강간도 모자라서 아들을
낳아달라고 하질 않나. 도망치니까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꼴까지 말이야. 상
식적으로 생각해봐라. 자기 아버지랑 사랑하는 남편 죽인 원수가 제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혀준들 상식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좋아하겠어? 너도 어머니
가 똑같이 당했는데 남을 울려야겠어? 그러고도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냐?
너는 죄값 받은거야, 임마. 난 7권을 읽으면서 널 돌팔매로 쳐 죽이고 싶더
라. 단목다루가 죽었다는 소릴 처음 들을때 "그깟놈의 새끼, 내가 알 게 뭐
냐?" 하고 소리칠 때는 언제고, 네 자식이라는 걸 아니까 눈이 뒤집혀?
뭐, "왜 말 안했어?" 제 자식일때만 소중하다 이거지? 이 쓰레기 같은 새끼
야. 산마로는 너무 마음씨가 좋아. 너같은 놈을 팔 하나 날리는 걸로 끝내
니 말이야. 하지만 어떻게 보면 더 잘 된 것일수도 있지. 다루가 자라서
그 사실을 알게되면 어땠을까?

그래도 9권에서, 죽기 직전에는 정신을 꽤 차리데. 아라를 지켜주다가 화살
을 맞고 죽으니까 말이야. 사람은 뒤늦게라도 뉘우치는 법일까? 물론 다 아
라랑 산마로 덕이지. 나는 지금 너를 미워하지 않아. 늦게나마 뉘우치고 죽
었고, 너도 처음부터 나쁜 놈은 아니었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단지 너도
네 어머니도 역사의 희생자일 뿐이지.

....부디 저승에서는 편하게 살기를 바란다. 언젠가 네 무덤가 - 작은 지석
묘- 에 찾아가마. 술 한잔 뿌려주고 나도 술 한잔 마셔야지. 그리고 넋두리
를 늘어놓고는 꽃을 뿌려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