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일시: 1999/11/16 오후 7:55
게시자: 돌베개
제목: 새로 고친 아라크노아 외전 - 견본....
안녕하세요, 파라반 누님, 돌베개(utari@netian.com) 입니다. 새 게시판에
써놓은 글을 보셨겠지만, 제 글이 너무 마음에 안들어서 고치기로 했습니
다. 오늘은 첫 걸음을 옮겼습니다. 보고 괜찮으면 이 글을 새로 올려 주셨
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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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시: 1999/11/27 오후 9:52
게시자: 돌베개
제목: 새로 쓰는 아라크노아 외전 - 아사나루치
※ 아사나루치
― 아라크노아 외전(外傳)
우리의 조국은 친구여, 황폐한 나라가 아니라네.
때가 되면 모든 나라는 새로 태어나고
모든 전사(戰士)는 새벽을 맞이하기 때문이니
―팔레스타인 저항시인 마흐무드 다르웨쉬의 시 『희망에 대하여』에서
(정신이)죽은 자는 태풍 앞에서 벌벌 떨지만,
살아있는 자는 그 태풍과 더불어 함께 걷는다.
― 레바논의 소설가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이 쓴 『칼릴 지브란의 잠
언집(The Spiritual Saying of Kahlil Gibran)』에서
우리는 적선이나 자선을 바라지 않아요. 우리가 바라는 건 정의입니다.
― 멕시코의 저항군 사빠띠스따의 부사령관인 마르코스가 1994년 멕시코 초
등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원히,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란다.
― 마르코스가 멕시코 북부에 사는 소년 미겔·바스케스·발티에르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떤 인종도 아름다움과 지력과 힘을 독점할 수 없게 되리라.
그때야말로 모두가 승리를 축하할 약속의 땅이 나타나리….
― C·L·R 제임스의 소설 「흑인 자코뱅 당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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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화 : [어린 거미, 낯선 동무들을 만나다.]
제 1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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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식민지 신천지(新天地)시 낙원구 평화동 1945번지.
― 지도에는 단지 그렇게만 나와있는 곳인 이곳은 퀘퀘하고 냄새나는 동네
다.
군데군데 벌겋게 녹이 슬고 주둥이가 일그러진 회색 쓰레기통은 바람이 불
면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길바닥에는 먹다 남은 생선 뼈
나 닭뼈다귀가 뒹굴고 있다.
언제 새로 칠을 했는지 모를 만큼 빛이 바랜 건물들은 시멘트와 콘크리트
가 군데군데 벗겨져서 철골이 삐쭉삐쭉 드러나 있고, 칠이 벗겨진 벽
에는 온갖 낙서와 그림이 그려져 있다. 모서리나 가운데가 깨진 유리창들
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내버려져 있고 유리가 깨진 채 불이 꺼진 가로등들
은
골목길을 지키고 있다.
낡고 찌그러지고 빛깔이 벗겨진 채 버려진 자동차 껍데기와 화면이 깨진
TV, 부품을 다 빼가고 껍데기만 남은 라디오 같은 고물들을 쌓아놓은 무더
기를 등지고 있는, 밤하늘을 보고 우는 개들이 이따금씩 조용함을 깨뜨리
는 곳. 이 구역에 낮선 손님들이 찾아왔다.
별이 빛나는, 차가운 밤에 한 그림자가 구둣발 소리를 내면서 골목길을 달
려가고 있었다. 하얀 입김을 뿜으면서 헉헉거리는 그림자는 오른손에
돌돌 만 신문뭉치를 쥐고 허리에는 물통을 차고 있었다.
두세 골목을 지나친 그림자는 잠시 멈춰 섰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림자
를 밤하늘의 별들이 비춰 주고 있었다. 그림자는 고개를 돌려 왼쪽과 오른
쪽 골목길을 훑어보았다. 불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골목길에는 구겨
진 종이나 일그러진 깡통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림자는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갖다 대고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숨소리
가 점점 잦아들었다. 밤하늘의 별들이 그림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한숨 돌린 그림자는 오른손을 담벼락에 갖다 댄 다음, 고개를 들어 밤하늘
을 바라보았다.
가늘고 긴 눈매, 검은 눈, 길고 오뚝한 코, 조금 두터운 입술, 말처럼 비
쩍 마르고 길쭉한 머리, 짙은 고동색인 피부, 짧게 깎은 검은 곱슬머리에
작고 동그란 안경을 쓴 젊은 남자였다.
`아사나루치` - 아라크노아 외전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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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양손에 검은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고 검은 빵모자를 썼으며 표범무늬
가 있는 검은 조끼와 회색 셔츠, 검은 바지를 입고 검은 구두를 신고 있었
다.
왼손에는 작은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고 허리에는 핸드폰을 차고 있었다. 그
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
를 왼쪽으로 돌렸다. 왼쪽 골목길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 입
구에서, 그 사람이 쓰고 있는 안경태만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오른손에 있는 신문뭉치를 꼭 쥐었다. 그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환하게 드러나 있었다.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는 눈썹을 모으고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담담한 표정을
짓고서 자기 앞에 있는 또 다른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오른손에 쥐고 있는 신문뭉치를 더욱 몸 쪽으로 갖다 붙이면서. `그림자`
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림자`는 검은색 가
죽 코트를 걸치고 검고 목이 긴 가죽장화를 신고 팔과 다리 부분에 옆으로
짙은 하늘색 줄이 난 짙은 남색 경찰관 옷을 입고 검은 가죽 허리띠를 두르
고 조금 큰 은테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림자`는 오른손에 총을 들고 이쪽
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림자`가
침묵을 깨뜨렸다.
그림자 : 수배번호 1960호, 맞지?
사내는 눈을 크게 뜨고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걸 써야 하나? 하고 사내
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신문뭉치를 슬그머니 뒤로 빼려고 했다. 그때,
다시 그림자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림자 : 헛짓거리 하지마. 이 불온분자야. 내가 네 수작을
모를 줄 알아? 넌 죽었어. 이 쌀밥이나 축내는
아저씨야. 날 놔두고 혼자만 재미보겠다 이거지?
그림자는 오른팔을 치켜들고 으히히. 하고 웃었다. 사내는 가슴에 오른손
을 대고 안도의 한숨을 소리없이 내쉬었다. 사내의 얼굴은 어느새 풀어져
있었다.
사내는 `그림자`에게 쥐고 있던 신문을 던져주었다. `그림자`는 신문뭉치
를 풀고 내용물을 들여다 보았다. 삼단으로 접는 작은 우산이 있었다. 우산
은 검은 점이 군데군데 박힌 자줏빛 이었는데, 동그란 손잡이느는 검은색
이었고 뼈대는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우산을 본 `그림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들었다. `그림자`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서 반쯤 드러
났다.
동그랗고 턱이 넓게 퍼진 얼굴, 뚜렷하게 솟아나온 보통 크기의 코에 조금
살이 찐 뺨, 속눈썹이 짙은 크고 검은 눈, 넓적한 이마, 호랑이 눈썹에 보
통 길이로 자른 검고 곱슬거리는 머리와 어두운 갈색 피부를 지닌 남자였
다. 머리는 오른쪽으로 가지런히 빗어 넘겼다. `그림자`는 다시 신문을 돌
돌 말면서 사내에게 돌려주고 이렇게 말했다.
그림자 : 밤바타. 정말 혼자 가도 괜찮겠어?
사내 : 남 몫 가로채지 마, 임마. 이번엔 내 차례니까 넌 이 형님이
일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돼. 쓸데없이
나서지마. 내가 알아서 할게. 빨랑 `도시락`이나 줘.
밤바타라고 불린 아프리카인 사내는 허리에 찬 물통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파란 빛깔을 띄고 있는 그 물통은 언뜻 보면 세라믹으로 만든 보통 물통처
럼 보였다.
몸통에는 잿빛 띠까지 둘러져 있었다. 몸통에는 굵은 하얀색 글자로
이런 글이 쓰여져 있었다. - " 축하 선물." 물통, 아니 "특제폭탄"은 달빛
을 받아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림자, 아니 말레이인 남자는 권총과
네모난 도시락통을 밤바타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긴장을 푼 얼굴로 밤바타
를 바라보았다.
밤바타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러나 눈썹을 V자로 모으고 묘한 얼굴로 웃
음짓고 있었다. 누군가를 비웃는 듯했다. 이제 던지기만 하면 돼. 하고 사
모리는 생각했다. …늙은이, 내가 특별히 주는 `축하선물`이니까 고맙게 받
으라고.
그는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동안만 얼굴
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고 싶었다. 바람 한번 시원하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태풍만 빼고 말이야. 언제나 태풍이 불어오면 착한 사람이건 나
쁜 놈이건 상관없이 모두 피해를 입잖아.
-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그는 재빨리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일곱시 십이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시간이 없구
나. 그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동료에게 말했다.
밤바타 : 그럼 다녀올게, 오마르. 오늘밤엔 집에 못 들어간다고
전해줘.
말레이인: 알았어. 일 다 끝나면 삐삐쳐라. 번호는 알지?
밤바타는 응. 하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뒤돌아서면서 망설일 것 없어.
어차피 오늘 하기로 했는데 뭐. 하고 중얼거렸다. 오마르는 어느새 자기가
준 권총과 `도시락`을 두 손에 들고 멀어져가는 밤바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밤바타가 어두운 골목길로 사라져 버리자 오마르는 바지주머니에서 삐삐를
하나 꺼냈다. 말끔하고 깨끗한 삐삐는 옅은 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마
르는 삐삐의 단추를 몇 번 눌렀다. 삐삐의 액정화면에는 이런 메세지가 떠
올라 있었다. : "도시락은 잘 갖다줬다. 01839 - 01963." 오마르는 삐삐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그의 동료가 사라진 골목길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점점 작아졌던 그는 아예 골목길이 그린 지평
선에서 사라져 버렸다. 달빛과 별빛만이 두 사람이 사라져 버린 골목길을
조용히 비추어 주고 있었다.
-밤바타라는 이름은 1904년 영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던 남아
프리카 원주민 족장의 이름입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그를 기려서 손자
에게 그의 이름을 붙였지요. 오마르는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중동에서
볼 수 있는 남자이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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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시 로마구(區) 카이사르 거리 1492 - R 번지는 백화점과 호텔이 몰
려 있는 번화가다. 반짝이는 스테인레스 뼈대를 네모나게 짜 맞추고 그 안
에 네모꼴인 반투명 유리(: 안에서 밖을 볼 수는 있지만, 밖에서 안을 볼
수는 없는 유리)판을 끼워 넣어서 만든 백화점들은 19세기 영국 박람회장
건물처럼 가느다란 뼈대와 빛나는 유리벽을 뽐내며 서 있다. - 모두 유리벽
으로 만든 것은 아니고, 밑부분이나 윗부분은(또는 두 부분 모두) 하얀 세
라믹으로 만들어 놓았다.
어떤 건물은 정육면체 건물 네 귀퉁이에 옛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모양을
본뜬 미나렛(:첨탑)이 서 있고, 어떤 건물은 육각형 몸통에 황금으로 만든
뽀족한 육각지붕( :바닥이 정육각형이고 정삼각형인 면이 여섯개이다) - 입
구와 마주보고 있는 면에 라틴어로 `즐거운 집` 이라고 써 놓았다 - 을 씌
워 놓고 여섯 둘레에 네모낳고 위로 올라갈 수록 좁아지는 로마식 하얀 대
리석 기둥을 세워 놓았다.( 대리석 기둥 위에는 그리스와 로마의 장군들을
에메랄드나 사파이어, 루비 원석으로 만들어서 세워 놓았다. 이들은 모두
오른손에 창이나 칼을 쥐고 왼손에 방패를 들고 있다. 또 이들은 모두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있으며, 조명을 받고 빛을 되쪼이면서 서 있다) 또 말에
박는 징처럼 생긴 어떤 건물은 둥그런 윗부분과 모두 유리벽으로 - 하얀 세
라믹을 쓰지 않고 - 만들었기 때문에 꼭 온실처럼 보인다. (이 건물은 낮에
도 밤에도 쉬지 않고 반짝인다)
이들은 모두 시내 가운데에 서 있는 뽀족한 탑을 에워싸고 있다. 옅은 잿
빛 화강암을 부드러운 사다리꼴 모양으로 다듬어서 세우고 그 뒤에 하얀 세
라믹과 빛나는 니켈, 티타늄, 스테인레스, 금, 은, 백금으로 만든 막대기들
을 - 길이나 크기는 각각 다르다 -뽀족한 피뢰침 모양으로 짜맟춘 탑. 맨
꼭대기에는 전류를 막아주는 진짜 피뢰침이 속이 환히 비치는 투명한 모습
으로 서 있다. 화강암에는 라틴어와 옛 그리스어, 영어, 프랑스어, 일본
어, 독일어, 에스파냐어로 이렇게 쓰여 있다 :
━ 자유와 진보에 끊임없는 영광을! ━
이 탑에서 방사선 모양으로 뻗어 있는 길은 언제나 시원하게 뚫린다. 지나
가는 차들은 모두 황금빛이나 은빛, 붉은빛, 파란빛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미끈한 곡선을 자랑하고 있다. 이곳에는 바퀴달린 차가 없다. 바퀴가 달려
있어야 할 곳에는 옛 바퀴처럼 생긴 원반이 - 구멍이 뚫리지는 않았다 -
ㄱ 자 모양으로 나와 있는 기계팔 끝에 달려 있다. 어떤 자동차는 지붕
위에 작고 모서리가 뭉툭한 네모꼴 위성안테나를 달고 있다.
다른 차는 지붕 위에 잠자리 날개처럼 긴 사다리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태양전지판을 붙이고 달린다. 이들은 모두 포장된 길에서 30㎝ 정도는 붕
떠서 다닌다. 잿빛으로 포장된 길에는 밤에도 반짝이는 노란빛을 띄는 곧
은 선이 죽 그어져 있다. 차들은 단 한치도 어긋나지 않고 그 선 위에서 달
린다. 번쩍이는 차들이 내쏘는 빛은 가로등과 백화점, 호텔이 내뿜는 네온
사인 불빛과 입체영상 광고와 함께 이 거리의 `밤`을 밝히고 있다.
이곳에는 신천지 시에서 가장 훌륭한 호텔과 백화점들이 다 모여 있는데,
특히 제 6 중앙도로 남쪽에 있는 「임페리움」 호텔은 이 거리에서 가장 이
름난 건물이다. 그리스·로마시대의 건물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호텔은
입구를 - 하얀 대리석을 써서 - 파리에 있는 개선문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
다.
- [임페리움]이라는 호텔 이름은 라틴어로 [제국帝國]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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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텔은 로마의 히드리아누스 장성처럼 하얀 대리석을 벽돌 모양으로 다
듬어서 쌓은 벽으로 담을 둘렀다. 담 위에는 뾰족한 쇠꼬챙이를 촘촘하게
박아넣었는데. 그것들은 모두 번쩍이는 금을 입혀 놓았다.
담 둘레에는 날씬하고 빛이 날 정도로 윤기가 흐르는 기관총 - 망원렌즈를
달고 총알의 빠르기를 조절하는 방아쇠가 몸통 옆에 달려 있으며 소음기까
지 달려 있는 - 을 들고 삐삐만한 크기인 냉각 액체 니트로 글리세린 폭탄
두름
을 보란 듯이 드러내놓고 허리에 두르고 있는 경비원들이 정수리 부분에 우
라늄으로 빛을 내는 전등이 달려있는 헬멧을 쓰고 순찰을 하고 있다.
담 안에는 미끈하게 만들어진 가로등이 은빛을 내면서 빨주노초파남보 무지
개빛을 가로등마다 하나씩 내뿜고 있다.
화성의 돌을 캐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붉은 빛을 띄고 있는 이 호텔의 포장
도로는, 마치 로마의 포장도로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다른점이 있다
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잿빛 `원반`이 길 위에 일직선으로 박혀 있다는 정
도다.
직선으로 시원하게 쭉 뻗어있는 이 도로를 따라가 보면, 로마의 판테옹 신
전처럼 대리석 기둥위에 반구형 지붕을 덮은 건물이나 19세기 영국의 수정
궁처럼 유리와 수정, 철골로만 이루어진 건물,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
미드를 닮은 수정 피라미드, 18세기 오스트리아 군주들의 궁전처럼 하얗게
벽을 칠하고 황금과 은으로 기둥을 칠해놓은 건물들을 만난다.
건물과 건물 사이가 너무 떨어져 있어서, 이쪽 건물에서 저쪽 건물을 보면
꼭 콩알만하게 보인다. - 비록 호텔이 불도저와 포크레인으로 울퉁불퉁한
땅을 밀어버리고 편편하게 만든 벌판에 세워지기는 했어도 - 빈 공간에는
골프장의 잔디처럼 잘 가꿔진 키 낮은 잔디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덩
치 크고 날씬한 말들이 떼로 모여서 풀을 뜯고 있다. 말들과 좀 떨어진 곳
에서는 산양이나 염소, 소들이 노닐고 있다.
이 건물들을 지나치면 떡갈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숲과, 수정처럼
차고 맑은, 숭어와 철갑상어, 연어가 뛰놀고 백조와 오리가 노는 호수를 만
난다. 나무에는 메추라기나 독수리, 올빼미가 둥지를 틀고 있고, 가끔 독수
리들이 호텔 주변을 빙 둘러서 날기도 한다. 숲은 호수 둘레를 둘러싸고 있
으며 호수는 언제나 맑은 물을 개울에 흘려보내 준다. 개울은 호수와 호수
를 이어주고 나중에는 호텔 바깥으로 - 담벼락 가운데 구석진 곳에 특별히
뚫어놓은 구멍으로 - 흘러간다.
이곳을 지나쳐서 계속 가면 마침내 온통 수정과 유리, 보석으로 만든 호텔
본관本館에 다다른다. 막히지 않고, 굽어지지 않고 죽 뻗은 길은 여기 본
관 앞에서 끝난다. 본관은 첨탑 모양으로 높이 솟아있는 잿빛 감시탑과 그
아래서 배 밑바닥을 엎어놓은 모양을 한 채 곡선미를 보여주는 - 그리고 반
半 투명인 방탄유리 장판들로 덮여있는 - 지붕, 기둥 하나 없이 세라믹 뼈
대만으로 조립되고 이어맞춰진 `몸통`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몸통은 곡
선을 그리면서 위로 갈수록 조금씩 좁아지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의 지구
라트를 곡선으로 그린 모양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떡갈나무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촘촘하게 심어져 있는데, 떡갈나
무 가지에는 성냥갑만한 물체가 박혀 있다. 나무껍질처럼 짙은 검은색인 물
체는 가운데에 있는 동그랗고 자그마한 렌즈를 360도 방향으로 돌리고 있
다. 이 물체는 사실 감시용 카메라이다.
본관 앞에도 경비원들이 잿빛 제복을 입고 머리를 박박 깎은채로 경비를 서
고 있다. 그들은 헤드기어가 달려있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으며 헤드기어에
는 작은 안테나가 달려 있다. 그들의 총은 뭉툭하고 미끈한 장갑으로 뒤덮
여 있으며 총신은 회색으로 빛나고 있다. 그들은 허리춤에 전기봉과 독가스
탄, 염산폭탄, 자동 소총을 차고 있으며 머리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안테
나가 달린 머리띠를 두르고 있다.
본관 허공에는 커다란 눈깔처럼 생긴 카메라들이 반중력 띠를 두르고 붕
떠 있다. 이들은 밤에는 공기의 빛깔처럼 검게 바뀌어서 모습을 감추고, 낮
에는 투명하게 바뀌어서 모습을 감추는 인공지능이 있다.
이런 호텔이 오늘따라 유난히 소란스럽다. 호텔 입구에 많은 사람들이 웅성
거리며 서 있기 때문이다. 양털로 만든 알록달록한 무지개 무늬가 새겨진
페루식 털모자를 쓰고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비비꼰 채 쟃빛 잠바와 청바지
를 입은 흑인이나 양쪽 뺨에 소용돌이치는 나선형인 검은 문신을 새기고 검
은 점이 알알이 박힌 귤빛 두건을 쓰고 선글라스를 쓴 황인종 남자, 머리
를 짧게 자르고 알록달록한 목걸이를 두른 흑인 여성, 금테 안경을 쓰고 머
리를 묶은 황인종 여자 등 여러 사람들이 팻말을 들고, 머리에 글자가 적
힌 머리띠를 두르고, 현수막을 들고 모여 있었다.
그들 앞에는 로마인들처럼 쟃빛인 특수 갑옷과 헬멧으로 두껍게 무장하고
검은 플라스틱 장화를 신은 전투경찰이 방패와 전기봉을 들고 진을 치고 있
었다. 그들은 하얀 김을 뿜어내며 시위대를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으며 그
들 뒤에는 쟃빛 장갑으로 2중, 3중으로 장갑을 두른 `장갑차`들이 위에 달
린 기관총과 작은 미사일 발사대를 뽐내며 서 있었다.
경비들은 경비들대로 시위대에게 총을 겨누고 으르렁거리는 얼굴로 시위대
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위대의 사람들은 비웃는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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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밤은 온갖 빛깔로 빛나는 네온사인과 가로 등의 등불, 그리고 화려
한 건물들이 내는 빛으로 가득 차 있다. 화성 하늘 위에서 빛나는 밤하늘
의 별은 뿌연 매연과 땅 위의 빛들 때문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오
직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 ― 포보스와 데이모스 ― 만이 밤하늘을
외롭게 지키고 있다.
그 아래 ― 「임페리움」호텔 입구 ― 에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하얀 입
김을 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시위대는 팻말과 현수막을 들고 머리띠를 맨
채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수건으로 복면을 하고 두건을 쓴 남자도 있었고, 얼굴에 구호
를 적은 탈을 쓰고 구호를 적은 웃옷을 입은 여자도 있었다. 중년 백인남성
은 선글라스를 끼고 마스크를 쓴 채로 팻말에 펜으로 글을 적어넣고 있었
다. 뺨에 무지개처럼 빨주노초파남보 일곱가지 빛깔로 소용돌이 무늬와 톱
니바퀴 모양의 무늬를 그려넣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호주 원주민 사내
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고 전투경찰과 경비원들을 바라보았다. 무엇인가가 그
들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올 때가 됐는데. 이거 우리가 잘못 안 거 아냐?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웅성거렸다.
그들 바로 앞에서는 잿빛 바탕에 팔과 다리 부분에 은빛 선을 두른 경찰 제
복을 입고, 왼쪽 가슴에는 알루미늄으로 된 이름표와 (바로 그 위에) 단순
화한 독수리 날개가 달리고 머리에는 번개가 세 가닥 달린 은빛 뱃지를 단
백인 경찰간부가 굳은 얼굴로 무선 수신기를 들고 있었다. 그도 하얀 입김
과 콧김을 내뿜으면서 시위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단추만 누르지 않았을
뿐, 그는 수신기를 들고 있었다. 여차하면 눌러 버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시위대 앞에는 기자들이 반원형으로 시위대를 에워싸고 있었다.
코트를 두껍게 입고 털모자를 쓴 기자들은 길다란 마이크를 시위대 위에 늘
어뜨리거나 비디오 카메라를 시위대와 경찰에게 들이대면서 역시 무엇인가
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이수첩을 꺼내 들고 연필을 대고 있는 기자도 있었
고, 조립식 의자 위에 앉아 HPC(휴대용 컴퓨터)를 꺼내 들고 시위대와
경찰을 힐끗힐끗 번갈아 쳐다보며 부지런히 자판을 두들기는 기자도 있었
다.
어떤 기자는 카메라 렌즈처럼 거리를 조절할 수 있는 쌍안경을 얼굴에 두르
고 오른손으로 열심히 단추를 누르면서 거리를 조절하고 있었다. 다른 기자
는 헤드폰을 낀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어떤 기자는 녹음기를 들고 있었
다. 그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윽고 한 목소리 ― 기자들 가운데서 나왔는지, 시위대 가운데서 나왔는지
는 알 수 없으나 ― 가 침묵을 깨뜨렸다. "저기 봐라! 군악대가 나온다!"
시위대와 경찰, 경비대, 기자들이 모두 호텔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호텔
하늘 위로 폭죽이 날아올랐고 폭죽은 터지면서 황금빛으로 불꽃을 만들었
다. 동시에 요란한 음악이 울려퍼지면서 군악대가 호텔 입구를 향해 나아가
기 시작했다.
군악대는 팔과 다리 부분에 금빛 선이 둘러진 푸른 제복을 입고 발에는 검
은 반중력 띠가 감겨진 검은 인조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다. 그들은 시퍼런
선글라스와 짧은 은빛 안테나가 달린 헤드폰을 머리에 끼고 있었고 거미줄
의 섬유성분으로 만든 푸른 헬멧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나팔과 북, 트럼펫
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호텔 문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경찰 간부는 재빨리 시위대 쪽을 바라보았다. 시위대는 무표정한 얼굴로 군
악대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수막도 쳐들지 않았고 팻말을 치켜들거나
구호를 외치지도 않았다. 그들은 관심없다는 얼굴로 앉거나 서 있었다. 아
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고 외마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저 하얀 김만 훅
훅 내뿜고 있을 뿐이었다. 간부는 좀 뜻밖이라는 얼굴로 시위대를 쳐다보았
다.
`웬일로 조용하지? 나야 좋지만 말이야.` 하고 간부는 생각했다. `어쨌거
나 잘 됐다.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그냥 가만있을 모양인데 그럼 나도 편하
지.` 하고 연이어 생각했다. 간부는 무선 수신기를 내려놓고 군악대 쪽으
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힘차게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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