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게시판

김혜린 [테르미도르]

먼저 야망이 드높았던 '클로오드'와 가난했지만 유순했던 '마들레느'의 사랑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분명히 잘못된 사랑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클로오드한테도 명백한 잘못이 있고 마들레느한테도 역시 잘못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인생쯤이야 거뜬히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희생은 오히려 미덕이라고 칭찬하곤 한다. 하지만 아니다. 이건 절대로 아니다. 여자의 사랑과 희생과 기다림이 소중한 줄을 눈꼽만큼도 모르는 남자한테, 여자 자신의 남은 인생을 모조리 걸어본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에는 사랑하는 남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 여자와 해줄 수 없는 여자가 있는 것같다. 그리고 클로오드 이 남자가 상대방 여자한테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적인 능력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끝없는 가난 속에서 마들레느의 한결같은 기다림은 '클로오드'한테 그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마들레느의 하염없는 기다림은 도대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걸까? 그것은 아마도 나는 한 남자를 변함없는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사랑했다는 여자의 자존심 만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리라.
사랑하는 것 자체가 한낱 종이 조각처럼 가벼워진 요즘에도 사랑 앞에서 그렇게 도도한 여자들의 모습은 가끔씩 만날 수 있다. 나는 가끔씩 그런 여자들한테 욓려 되물어 보고싶어진다. 왜 당신의 인생은 챙기지를 않고, 남편과 자식의 인생만 그저 맹목적으로 챙기려고 드는가? 그러면 그들은 이내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을 한다. 나는 남편과 자식을 사랑한다. 남편과 자식이 잘 되는 것이야 말로 바로 내가 잘 되는 것이다. 상대방을 위해서 희생할 줄 알고 양보할 줄 아는 것이 진정으로 인생을 깨달아 가는 것은 아니겠는가? 물론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게 전부 다는 아닐 것이다. 여자는 헌신적으로 남편의 인생을 챙기고 그 보답으로 험난한 세상살이 속에서 남편의 든든한 보호를 은연 중에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로 한 때 사랑하였던 클로오드와 마들레느는 제각기 상대방한테 은연 중에 바라고 있었던 것들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능력으로는 사랑하는 상대방이 바라는 바를 결코 채워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끝끝내 파탄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사랑하는 일에는 사랑하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을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도 때때로 필요한 것인가 보다. 클로오드는 사회적인 지위를, 마들레느는 변함없는 소박한 사랑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클로오드와 마들레느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아직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 하면, 사형대에서 클로오드가 죽어갈 때 마지막으로 마들레느의 이름을 소리쳐 부른다. 병든 마들레느 역시 클로오드가 사형 집행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고선 그 곳으로 거의 넋나간 듯이 쫓아간다. 그리고 마들레느 역시 사형당한 클로오드를 뒤따라서 죽는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서로 사랑하는 능력은 없었던 것일까?
어쨌든 클로오드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답게 '사랑' 보다는 '야망'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마들레느는 이미 변심해버린 사랑을 포기할 만큼 그렇게 영악하지도 강인하지도 못한 한없이 선량하고 유순한 여자였다. 마들레느는 하염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면 클로오드가 반드시 돌아올 줄 알았던 모양이다. 요즘 착한 여자들도 그렇게 남편한테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하면 남편은 다른 여자한테 한 눈 안팔고, 한 평생동안 아내 곁에 있을 줄만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 아내가 역시 최고야!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착하고 헌신적인 여자도 남자의 마음을 분명히 사로잡을 수 있겠지만, 능력있고 개성적인 여자 또한 분명히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리라... 그러니깐 착하고 헌신적인 여자의 모습만이 최고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남편의 그늘 속에서 다소곳한 여자의 모습도 아름답다 할 수 있겠지만, 사랑 앞에서 자유롭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여자의 모습 얼마나 매력적인가?
마들렌느한테 사랑과 기다림은 오히려 그녀 자신을 스스로 병들게 만든다. 결국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병들게 만드는 것은 아니겠는가? 나중에라도 클로오드가 마들레느를 다시 찾아왔다 할지라도, 가난하고 병들고 무기력한 마들레느를 오히려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았을까? 그땐 이미 꽃다운 젊은시절 클로오드를 첫 눈에 반하게 만들었던 마들레느의 청순함 또한 깡그리 사라지고 없었을테니깐... 그러니깐 서로 아무리 사랑한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이 몸과 마음 모두 병들면 이미 상대방의 마음을 붙잡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변함없는 사랑과 기다림은 아름다운 미덕이다. 그렇지만 마들렌느는 사랑과 기다림으로 이미 육체적으로 병들어 있었고, 정신적으로 황폐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자들 군대 용어 중에서 '여자들 고무신 거꾸로 바꾸어 신는다'는 말이 있다. 알뤼느는 처음에는 귀족 남자 줄르를 사랑한다. 나중에는 혁명가 유제니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데도 알뤼느의 사랑은 오히려 마들레느의 사랑보다 건강하고 약동하는 생명감을 느낄 수 있다. 오죽했으면 알뤼느와 유제니가 정말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될까? 알뤼느와 줄르 서로 간의 사이에서 사랑의 감정은 떠났지만 서로가 서로의 인생을 아끼고 존중하는 모습은 너무나 보기 좋았다. 알뤼느는 사랑 앞에서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것같았다. 그러한 사랑의 태도는 자기 자신의 영혼을 부쩍 성장시키고, 어려움과 불행에 처한 주변 사람들의 삶 또한 구원할 수 있는 강인한 힘을 갖도록 하는 것인가 보다.
프랑스 혁명이 파국으로 치달았을 때에도 알뤼느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지 않고 그 어렵고 힘겨운 와중에서도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찾아낸다. 그러고보면 클로오드에 대한 마들레느의 일편단심 헌신적인 사랑과 기다림은 오히려 상대방 남자한테 은연 중에 무거운 짐을 지우는 사랑이 될 수도 있을테지만,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방향이 달라짐에 따라 사랑의 대상자 또한 줄르에서 유제니로 방향을 바꾼 알뤼느의 사랑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알뤼느의 주변에서 절망의 늪에서 허덕이는 이웃들을 구원해 주지를 않는가?
오죽했으면 마들렌느의 사랑은 그녀가 열달 배 아파서 낳은 아들 유제니의 인생을 돌보는 것보다 내팽켜쳐 버리지를 않았던가? 아마도 건전하고 건강한 사랑은 이러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알뤼느는 세상 대부분 여자들처럼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서 찾아오는 사랑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의 영혼이 끌어당기는 남자를 찾아서 먼저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다행스럽게도 알뤼느가 은연 중에 선택한 남자 유제니도 알뤼느한테 남몰래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사람의 크고작은 취향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이 관심 있는 문제를 중심으로 세상에서 존재하는 사물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황이 바뀐다면 취향도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리라.
지난 시절 귀족 처녀 알뤼느가 귀족 남자 줄르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하지만 알뤼느가 속한 시대는 급진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당파와 혁명파가 서로 격렬하게 부닥치고 있을 때 알뤼느는 조금씩 혁명의 정신에도 관심을 갖게 되게 그동안 무심(無心)하였던 민중에 대해서도 따뜻한 관심을 갖게 된다. 그와 더불어 왕당파와 혁명파라는 조건과 서로 다를 뿐이고, 사람됨됨이는 쉽게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줄르와 대립 관계에 놓여있는 유제니한테 관심을 갖게 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으리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일편단심 해바라기 사랑을 도덕적인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알뤼느의 한 번 변심한 사랑도 아름답고 애틋하게 자신의 사랑을 희망적으로 전개시켜 나간다. 물론 줄르는 알뤼느한테 나무랄 데 하나도 없는 너무나 좋은 연인이었다. 한번쯤 변심한 사랑 그러나 자신이 선택한 사랑 그리고 희망적으로 펼쳐나가는 알뤼느의 사랑은 참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같았다. 마들렌느의 사랑은 기다리는 사랑이고, 알뤼느의 사랑은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사랑이다.
나중에는 알뤼느 유제니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거지? 유제니는 죽고 줄르와 알뤼느는 서로 결혼을 한다. 그리고 줄르와 알뤼느는 유제니가 돌보았던 소년을 정성껏 돌보아 준다. 또한 줄르와 알뤼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유제니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줄르는 유제니의 인생을 존중하였고, 알뤼느는 유제니의 인생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가능했으리라... 그리고 한 때나마 알뤼느의 변심 속에서도 줄르와 알뤼느가 서로 좋은 감정으로 서로 결혼을 약속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줄르와 알뤼느 서로가 서로를 연인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인간으로 존중하는 마음은 늘상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언제나 늘상 줄르는 알뤼느를 정말 아주 많이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알뤼느는 줄르가 자신을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그녀는 남자한테 사랑을 받는 방법을 선택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마음 이끌리는 남자를 사랑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던 것인가 보다. 그것이 바로 알뤼느가 선택한 알뤼느의 사랑이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알뤼느의 사랑은 주변 사람들도 구원할 수 있는 그렇게도 넉넉한 여유를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랑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 세상에는 많은 여자들과 남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일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같다. 나는 두 여인이 저마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남자를 사랑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클로오드를 사랑하는 마들렌느와 유제니를 사랑하는 알뤼느를 사랑을 서로 비교하면서 살펴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