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일시: 2000/02/05 오후 3:58
게시자: 돌베개
제목: 큰마로, 아무르를 지키는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이여
[불의 검]에서, 나이가 많은 조연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조연을 뽑으라면
나는 기꺼이 푸른 용부의 부(副)수장 삭검과 1권에서만 나온 아무르
천수부(아마도)의 야장인 큰 마로를 든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하나만 고르라면(사실 둘 다 존경스럽지만)
큰 마로를 존경한다고 말하고 싶다.
큰 마로. 아무르의 백성, 이름없는 백성이고 망한 나라의 백성이지만
꿋꿋하게 버티며 살아온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 망한 나라의 슬픔을
쇠를 두드리며 달랬고 노예로 끌려가는 동족들의 이야기를 듣고도
슬픔을 드러내지 못하고 울음을 목구멍 안으로 삼켜야 했으며 아내를
잃고 딸아이와 함께 보따리 하나만 들고 지게에 딸아이를 앉힌 채
지게를 지고 와서 실카강 산골짜기에 숨어든 사람.
그는 맨 처음 실재로는 아무르 가라한인 산마로가 떠내려 왔을 때
그를 살려 주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의 목숨을 살
리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산마로가 깨어났을 때 산마로
를 심문한 일도, 산마로를 카르마키 이방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쉽게 화를 잘 내지만(그런 점에서, 나와 닮았다 ^_^)
자기 딸 아라가 "아무르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댓잖아. 이 사람
을 죽이면 아무르나 카르마키나 다를 게 뭐야..." 고 말하자 화를 거
두고 산마로의 목숨을 살려준다. 그런 점을 보면, 그는 천성이 나쁠
래야 나쁠 수 없는 사람이다.
우직하고, 슬픔과 한(恨)과 분노를 드러내지 못하고 숨겨야 하고,
그 분노를 다른 방법으로(칼을 들고 싸우는 대신 대장간에서 망치를
두드리는 식으로) 풀어야 하는,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원수들과 싸우는(밤에 청동칼을 몰래 들고 카르마키의 성이나 목장에
쳐들어가는 식으로) 사람.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동족들을 사랑하고,
자기 딸을 사랑하는 사람. 그는 웬지 평민 출신인 우리네 독립군
병사나 의병이었던 사람들과 너무나 비슷하다.
나는 큰마로의 성품 - 우직하고, 고집이 세고, 슬픔과 한을 품고 있
으면서 결코 주저앉지 않고 저항하는 - 을 좋아하고 그를 존경한다.
그가 산마로를 돌보고 목숨을 살려준 일은, 그가 산마로가 가라한 아사
임을 몰랐기 때문이고, 단지 그를 `자식뻘되는 젊은이` 로만 여겼기
때문에 더욱 순수하고 값지며 아름답다.
- 만약 그가 상대방 신분을 알고 그랬다면, 얼마나 추악한가! 단지
댓가를 바라고 살려주었거나 아니면 `아랫것` 의 당연한(?) 도리
로 가라한을 살려 주었을 테니 말이다 -_-+;::
아마 큰마로는, 자기 아내가
자기같은 `못난`(사실 이 말은 쓰고 싶지도 않지만 -_-;::) 남편 때문
에 카르마키가 쳐들어 올 때 죽임을 당한 일이 떠올라서 일부러 산마
로를 자기 집에 머무르라고 하지 않았을까?
다시말해서 아라가 자기 아내(즉 아라의 어머니) 처럼 비참하게 죽지
않게 하려고 `든든한` 젊은이인 산마로를 일부러 집에 머무르게 하고
나중에는 아라와 맻어주려고 하지 않았나 한다.
(그러니까 아라는 그대로 산마로에게 빠졌고 큰마로는 산마로를 사윗
감으로 점찍었다는 얘기 -.-)
그래서 집에 손님으로 머무르게 하는 동안 어느 새 큰마로는 산마로
에게 정이 들어, 마치 친자식처럼 여기게 되었겠고.(아라가 산마로를
님으로 여겼다면 큰마로는 산마로를 아들처럼 여겼다. 굳이 따지라면
사위도 자식이니까. -_-)
지금 다시 그를 생각하니 정말 슬프고 가슴이 시리다. 아무르의 백성
이고 마땅히 편안히 살았어야 할 우리네 아버지 큰마로가 이름 없는
백성으로 살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으니 말이다. 그가 아무르가
일부분이나마 땅을 되찾고 카르마키에게 신나는 공세를 퍼붓는 모습
을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나마 왕족이나 귀족들은 그들을 기리는 무덤이라도 제대로 갖춰져
있고 역사기록도 그들을 위해 봉사(!)하지만, 큰 마로는 이름없는 평
민이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 기리지도 않고 있다. 사실 바위궁이나
구석에 처박혀서 안전한 곳에서 명령이나 내리는 윗대가리들 보다는
큰 마로처럼, 무너진 나라를 되찾고 노예가 된 동족을 노예에서
구하며 적이 많고 힘이 셈을 두려워 하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숨 걸고 싸우는 백성들이 있었기에 아무르가 그래도 이만큼이나마
일어설 수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왕족과 귀족들의 공만 찬양해서, 그들의 쓸데없는
짓 - 예를 들어 술맛이 안 좋다고 투정하거나, 주색잡기를 행하는 일
- 은 "영웅호걸의 호탕(?)한 일" 이라고 추켜세우고 백성들의 공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포상은 무슨 놈의 포상." 이라고 윽박
지르며 내쫓아 버리기 일쑤다. 그나마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러니 아랫것들은 할 수 없어."
라고 소리지르며 매를 때리고 돌팔매로 치고 `엄중한(?) 심판`을
내리기를 서슴치 않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따위 한심한 백성들을 데리고 우리 하늘의
대리자 께서는 얼마나 고생이 많으신가? 정말 안타깝다."고 떠들면서
억지로 눈물을 쏟기까지 한다.
그래서 나는, 산마로나 삭검, 형압, 우이, 미루, 지루보다는, 차라리
흰 석수 할아버지(알 만한 분은 다 아시죠?)나 날쌘마로, 곰바우, 큰
마로를 더욱 존경하고 좋아한다.
비록 풀 한포기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지만, 왕궁은 무너지고 사라져도
그들의 넋은 계속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아무도 큰 마로와 흰 석수 할아버지, 날쌘마로, 곰바우, 청산녀를 기리
지 않기에 이 못난 필부(匹夫)가 감히 붓을 들어 큰 마로를 평하고 그
를 존경하며 기리는 뜻을 여기에 분명히 밝힌다. 큰 마로는 아라의 아
버지이자 산마로의 장인이며 나의 아버지이고 우리 모두의 아버지인
것이다. 그는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이며 우리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쓸쓸하고 추운 바람이 몰아치며 눈이 가득 쌓이고
개울이 꽁꽁 언 실카강가에서, 무덤 앞에서 그 분(큰마로)을 기리는
글을 쓰고 여기에 바치옵니다. 부디 편히 쉬옵소서.
언젠가는 봄이 올 것입니다. 추운 바람도, 눈도 몰아내고 꽃이 피고
새순이 돋아나며 풀이 자라나는 새 봄이 올 겁니다. 그 때가 되면,
강가에 꽁꽁 언 얼음이 녹아 풀리고 실카강도 촤르르 소리를 내며
흘러갈 것입니다. 새들도 다시 찾아오고 짐승들도 굴에서 나오고
개구리가 땅을 파고 다시 튀어나오겠지요. 따뜻한 봄바람이 다시
불어올 것입니다.
그 때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큰 마로님.
그 때 다시 작은 가야금과 찻잔과 차와 풍로와 향로를 들고 와서
찾아 뵙지요. 차를 끓여 바치고 노래를 지어서 바치고 가야금으로
풍악을 올려 드리겠습니다. 향로에 향을 태워서 바치고 나무 껍질
을 모아 방망이로 두들겨서 만든 옷감에 숯과 광물로 만든 먹물과
먹, 벼루, 물그릇, 갈대를 꺾어서 만든 붓도 가져와서 큼지막하게
기리는 글을 써서 바치지요.
그 때쯤이면, 사위인 산마로와 따님 아라와 외손자인 단목다루도
돌아와서 무덤을 가꾸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시는 외롭지
않을 것이니 부디 그때까지만 기다리옵소서.
마음을 다해서 인사를 올리는 바이며, 봄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
라옵니다. 그럼 이만.
* 네티즌 이재환(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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