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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시: 1999/11/14 오전 12:15
게시자: 돌베개
제목: 천궁, 쓸쓸한 지도자의 초상
나는 천궁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왜냐하면 그는 왕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
히 말하자면 그는 왕인데 왕다운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는 불행한 왕이기 때
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라를 이끌어야 했다. 외적은
쳐들어오고 군대는 싸웠다 하면 깨지고 아버지인 선대왕은 죽고 많은 백성
들이 죽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이런 현실을 막을 수 없었던 그의 마음은 어
땠을까? 속으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울지 않는다.
비록 속으로는 울지만 겉으로는 태연자약한 것이다. 왜? 그는 `완벽한` 왕
이어야 하니까. 허울좋은 `하늘의 아들` 이니까. `완벽한 하늘의 아들`은
보통 아랫것들처럼 울거나 포기하거나 추한 꼴을 보여서는 안 되는 법이다
(라고 사람들은 믿고 있고. 지도자에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한다).
그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워야 했다. 어릴 적에는 적들과 싸워야 했고(8권
에 잠시 나온다), 자라서는 열등감과 싸워야 했으며 왕이 된 뒤에는 자기
자신의 감정 - 질투심이나 굴욕감 - 과 싸워야 했다. 친구에게 질투심을 품
어야 했고 열등감까지 느껴야 했다. 사랑하는 여인은 친구만 바라보고 자신
에게는 마음을 주지 않는다. 자신은 그런 친구와 여인을 보면서도 자기 스
스로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꾹 눌러 참아야 한다. 그는 왕이고, 이끌어
야 하는 백성들과, 되찾아야 하는 나라가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적
이 눈 앞에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비록 아사와 소서노에게 가려지기는 했어도) 훌륭한 지도자이
다. 어린 나이에 카르마키군과 싸우면서 다친 뒤, 아사가 다친 곳을 붕대
로 싸매려고 하자, "염려 마라, 아사 .... 내가 아무르의 왕, 하늘 큰 활,
천궁이다. 내가 아무르의 아버지다!"라고 외친다. 그는 한시도 자기가 지도
자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고, 그만큼 자기 나라와 겨레를 사랑한
다.(2권에서. 중원군의 원군을 청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중원식 예복을 입
고 사신을 맞아들여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그는 `이름만 왕일 뿐 내
가 제대로 왕이던 적이 어디 있단 말이냐. 작고 힘없는 약한 나라에서 태어
나 살다가 이제는 남쪽나라의 옷을 입고 예를 따른다.`고 한탄한다.
그렇다. 그는 강대국의 제왕이 아니고 한번 패망한 적이 있는 약소국, 독립
전쟁을 힘겹게 치르고 있는 나라의 왕이다. 그는 강대국에게 굽신거려야 하
며 자신의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강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왜? 그는 왕이고 한군데 흠집 없는 `하
늘의 아들` 이니까. 적어도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는 차갑고 딱딱하다.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웃거나 속을 내비치는
일이 없다. 그의 말대로 "왕은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되고 진심으로 믿어서
도 안 된다." 그는 이런 명제에 아주 충실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천궁을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꾸짖거나 깎아내리고 싶지
는 않다. 그는 시대가 만든 `결과물`일 뿐이니까. 그리고 어쨋든 아무르 백
성들을 돌보고 있으니까. 단지 그가 하루빨리 나라를 되찾고 백성들을 다
거두어서 태평성대를 이루기를 바랄 뿐이다.
- 나는 천궁을 지지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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