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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시니컬했던 중고등학교 무렵...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라는 푸쉬킨의 시를 입에 달고다녔다.
어리고 철딱서니없고 이기적인데다 고집불통 독불장군이기만 했던 내 눈에조차도...
최루탄이 터지는 가운데 국기게양식과 하강식이 이루어지고,
아홉시 뉴스의 땡 하는 뉴스와 더불어 'xxx대통령은 오늘...'이라는,
미디어 전체가 국정 홍보처처럼 이용되는 사회풍경은 너무나도 어이없었고...
'학교의 지시대로 자율학습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담임이 대걸레 자루를 들고 버티고 있는 가운데 쓰고 지장을 찍어야만 했던 학교 생활이라는 것은...
친구들과의 농담따먹기하고, 쉬는시간마다 도시락까먹고, 청소하는 도중에 람보흉내 내며 친구들과 전투를 벌이고, 수업을 땡땡이치고 옥상에 올라가 담배피고, 지각할 때마다 학교 뒷산쪽에 둘러쳐진 담을 뛰어넘어다니는 재미로만 버티며 살기에는, 너무나 짜증나는 매 시간 매 분 매 초의 연속... 그자체였다.
받아들이기엔 힘겹고 극복하기엔 버겁고 그냥 잊어버리기엔 너무나 역겨워,
그저 푸쉬킨의 시를 입에 달고 다니며,
모든 세상에 속아버린 어린 모습을 꽁꽁 숨긴채, 세상일에 초연한 듯한 어른의 가면을 쓰고,
'하늘은 길고 땅은 영원하다'라고 하던 태상노군 노자의 흉내를 내고 다니며
모든 것을 외면해버렸던 그때 그 모습들이
과연, 그 때 그 당시에...
나만이 홀로 했던 선택이요 모습이며 초상화였을까?
상처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물기어린 축축한 눈동자로,
부귀영화를 목표로하는 사람들은 비웃게 마련인...
그저...아주 작은 소망 하나를 마음 속으로만 되뇌이고 또 되뇌이던 낙오자적 정서의 [비천무] 속 한마디 한 마디가 촌철살인, 사람의 마음 속을 깊숙히 찌른채 빠질 줄을 모르고,
강간당해 결국 괴물처럼 변해버린 혁명 속에서조차도 사람이길 원하며,
땅 위에서 사그라든 패배주의자적 청춘들의 [테르미도르]를 외면하고 싶어했던 마음 또한,
어쩌면, 그 때의 내 자신의 불안함과 불편함,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 외면해버리다가 결국 검게 타들어가버린 내 마음이 그대로 투영되어버린 것에 대한 굴욕감과 자책감때문이었으리라...
(영화 <B천무>가 원작을 망쳤다는 비판을 받고,
앞으로 방영될 드라마 <비천무> 또한 영화 <B천무>와 비슷한 비판이 바닥에 깔려있는 의심과 걱정을 사고 있는 이유 또한 아마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작품 전체를 휘감고 있는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현대의 트렌드에 걸맞는 코드 몇개를 뽑아내어 새로운 컨텐츠로 창출하여 만들고자 하는 그 시도들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단순히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벌이는 급급한 비즈니스가 아닌가 하는 것... 말이다.
작품은 페이지 페이지 글 한 줄 그림 하나에도 정서가 흘러넘치는데,
그걸, 호쾌한 무협 액션씬과 꽃같은 선남선녀 둘이서 애간장 녹이는 멜로씬벌이는 것으로 100% 커버가능하다고 여기는게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ㅠ.ㅠ )
20대 초입부터 [불의 검]을 보기 시작했다.
연재되다가 중단되고... 다시 출판사를 옮겨 연재되고...
그래도 쉬임없이 매 한 권 한 권 단행본이 나올 때마다,
혹여 절판이라도 되면 어쩌나 발을 동동 굴러가며 서점으로 달려가길 12년...
[불의 검] 과 그 주인공들 못지 않게
나 또한 그 12년 세월을 그저 순탄하지만은 않게 지냈고,
작품 속 그들처럼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으며...어떨 땐 벅찬 감동으로 가슴이 무너져가며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보냈다.
어쩌면 나중에 백발이 성성해질 무렵,
내 스스로 돌이켜본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까지는,
[불의 검]이 8할이었노라...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만큼...
나는 [불의 검]과 함께 몸도 마음도... 그렇게 세포분열을 거듭하며 성장했다.
[불의 검]과 함께 보냈던 초반 몇년,
난 작가 김혜린 선생님이 작품을 두고 '이는 활달한 야만의 노래다'라고 한 부분에 대해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남들 입타기에 딱 좋은 화냥년 인생이 되어버린 가엾은 아라와
자신이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불멸의 사랑을 앞에 두고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아사의 애닯음과 그 구구절절한 과거사는 물론,
바리, 소서노, 천궁, 비파녀... 심지어는 정략결혼을 위해 산넘고 물건너 머나먼 북국땅에 온 차비 여희까지...
사연없는 사람이 없고 마음 한 번 안타들어간 사람이 없는 그 이야기들은,
작품 속 주인공들의 고생과 더불어 바이오리듬까지 비슷해져버린,
그야말로 혼연일체의 독자인 나로선,
도대체, 작품 그 어디에서 '활달'을 찾아야할런지 도무지 오리무중이었다.
가끔씩 나오는 개그스러운 한마디 한마디 (예를 들자면, 아사가 하던 그 말, '껍죽댔으면 허리를 분질러버릴 뻔 했는데...'라는... )를 '활달'로 쳐야할지...
솔직히...난 먹먹한 가슴만 안고 작가 선생님이 이야기한 '활달'을 어디에서 찾아야할지 난감해하고 감감해하기만 했다.
그런 느낌들이 서서히 벗겨져나가기 시작하며...
작품에 대한 어떤 일종의 신내림같은 감을 잡기 시작한 것은...
바로... 7권이었다.
비록 다시 보진 않겠다, 다신 찾지 않겠다 등등의 헛된 맹세를 거듭했어도
결코, 패배를 맹세한 적 없던 아사가 아라를 되찾기위해 하던 그 맹세에서 서서히 감잡기 시작한 작가 김혜린 선생님의 '활달'과 '야만의 노래'라는 그 화두를,
나는 8권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찾아버렸다.
바리와 아사가 나누던 가슴 짠한 대화들과
차비를 달래고 나오던 소서노가 소희를 향해 독백처럼 하던 말들,
그리고... 그녀가 하늘과 맞닿아있는 고고한 신성을 떨쳐내고,
그저 한 인간으로서, 그녀가 바라보는 인생사와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힘차게 꿈꾸는, '자만에 가까운 자존심을 당당히 되찾기'를 바라는 호쾌한 야망...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 김혜린 선생님이 서두에 쓴 것처럼, '또 징징 사극이냐...'라고 한 전작들과 [불의 검]에 깔려있는 정서가,
기존의 작가의 전작들에 깔려있는 낙오자적 정서나 패배주의자적 정서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자만에 가까운 자신감'의 정서로 가는 분수령이다...라고...
난 그렇게 결론지었다.
'패배주의적 정서 = 세련미'로 착각하는 퇴폐적 낭만주의가 판을 치는 지금 이 사회, 이 상황에 대해,
[불의 검]이 갖고 있는 벅찬 느낌, 단순한 고난 극복 & 역경 딛기 스토리를 한 차원 뛰어 넘어, 살아 숨쉬는 생생한 감동으로 승화된 그 한 마디 한 마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거짓 눈물, 거짓 느낌... 온통 거짓으로 가득차 외려 진실이 외면당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모든 껍질과 멍에와 구속을 벗어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맨 몸뚱아리 그대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작가가 직접 길을 만들고 새로이 갈고 닦아 만들어내버린 또 하나의 이정표다...라고...
난... 결론의 결론을 또 한 번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7권과 8권을 보던... 그때 즈음인거 같다.
온 마음에 덕지 덕지 물때처럼 가득 끼인 시니컬을 던져버리고,
내 스스로 살아가야 할 의미를 목마른 사람이 우물파는 심정으로 찾아헤매기 시작하던 때가 말이다.
기름냄새와 동물 비계 냄새가 부엌을 넘어 절 전체를 휘감아내려도 한 달 내내 육해공군을 꼬박꼬박 삼시 세때 밥상에 올려주시던 공양주 보살 할머님의 메마른 손마디마디에서,
손수 지은 탕약을 달이고 몸에 좋다는 말차를 손수 저어 말간 백자기에 담아주시던 스님의 작은 웃음과 촌철살인의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아라를, 아사를, 소서노를 거듭하여 발견하다가,
결국 온 몸을 짜르르 흘러내리는 전율같은 감각 속에서 하산을 결심했던....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그때가 말이다...
(혹 비웃으실지도 모르겠다.
7권이 되어서야 그 의미를 찾았느냐고... ㅠ.ㅠ
인정한다...엄청 둔한 이 몸....흑...ㅠ.ㅠ
다른 분들은 언제 이미 다 찾으셨을까... 흑...ㅠ.ㅠ
그렇지만... 그 전에는... 아무리 봐도 못찾았다 정말로... ㅠ.ㅠ
간간히 힘을 내는 한마디 한 마디는 있었어도...
7권과 8권처럼 그 아우라가 확! 하고 와닿는 곳은 정말 없었다...물론... 개인생각에 말이다... 흑...ㅠ.ㅠ)
완결된 12권을 읽은 지금의 나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운운하는 그 싯구절에 대해,
'개뿔이!'라는 단칼의 한마디를 던지고, 과감하게 코웃음을 칠만큼
머리도 크고 마음도 컸다.
냉소적으로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라고 되뇌이기보다는,
사람이기에, 사람이니까,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충분히 슬퍼할 줄 알고... 충분히 분노할 줄 알아야한다는 것이...
그래야만이 충분히 기뻐할 줄도... 충분히 즐거워할 줄도 알게 된다는 것이...
12년간 [불의 검]을 기다리며 보고 또 보아온,
작가 못지 않게 고집불통스러운 독자가 어버버버거리며 내리게 된 결론 한마디다...
[불의 검]에 대해서,
난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다.
너무 많아서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몰라...
누군가 '그 감상을 말해달라'라고 한다면,
느낌표만 100만개 찍어버리고 있을만큼...
난 하고 싶은 말이... 토해내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아...
무슨 말을 적어야 할지 모를만큼 아직도 더듬더듬 거리고있다...
분명한 것은... 두 가지다.
[불의 검]이 완결되기까지 지난한 세월을 보내왔던 만큼...
나 역시도 그 못지 않게 자라고 크고 성장해왔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잘 웃고, 잘 울고...
그 웃음과 그 울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만큼의 인간성은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불의 검]주인공들만큼 고고하고 단아한 성품은 못된다 할지라도,
소서노의 말처럼,
힘든 사람들 향해 내 어깨 좀 아프더라도 손목 아프게 내밀 수 있을만큼은 된다는...
영웅호걸같은 모습이나 세상을 구원하는 혁명주의적인 전사는 못된다할지라도,
세상 한귀퉁이에 내 자리에 오똑이처럼 고개빳빳이 들고 서서,
내 사람 아끼고 내 사람 좋아하고 내 사람 아픈 것에 같이 아파할 줄도 아는...
그런, 사람 구실같은 구실은 제대로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어쩌면...
그 단순한 웃음과 울음이...
그 당연한 손 내밀 수있음이... 그런 사람 구실 하면서 살아가는 구색들이...
사람 사는 모습으로 당연하게 갖춰야 할...
태어나자마자 이미 갖춰져있던...
세상에 빼앗겼지만 그걸 빼앗긴 줄도 모르고 멍청하게 있다가,
뒤늦게 깨닫고 되찾기 위해 너무나 굽이 굽이 머나먼 길을 돌아와 다시 발견해야만 했던...
인간의 본성, 그대로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p.s. 아...
[불의 검]을 다시 읽다가...
도저히 못참고... 필받아 써버렸습니다... ㅠ.ㅠ
이를 어쩌나...흑....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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