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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때, 언제나 나를 회색분자라며 몰아붙이던 선배 한 명과 후배 한 명이 있었다.
이 나라는 무언가 잘못 되어있다며,
거대한 변화가, 구조 전체를 흔들어댈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혁명이 있어야한다며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난 그들을 참 좋아했지만, 그들이 나를 좋아했는지는 잘 모른다.
술자리를 할 때마다 툭하면 나를 향해 회색분자라고 나무랐고,
이제 좀 고마하자, 형이랑 너랑 울 학교 nl의 거두인거 다 아는데, 그건 그기고 여긴 여기다, 술이나 좀 편하게 마시자...라며 항변했지만,
그런 나의 항변을 간단히 무시하고,
너의 사상을 밝혀라, 언제까지 이 모순에굴복하며 살꺼냐, 운동에 동참해라...라며, 소주 한 잔 달게 꿀떡 삼키지 못하게 나를 몰아붙여댔으니 말이다.
부모님에게서 학비에 책값에 용돈에 데이트 비용에 술 한 잔 마실 돈까지 꼬박 꼬박 타내며 운동을 하는 혁명주의자인 그들이 바라보는 나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벗어날 생각도 못하고 그 굴레 속에서 학비 한 푼, 생활비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아둥바둥 거리며,
지배자의 입맛에 점점 더 정복되어가는 미련한 프롤레타리아 개미 한마리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미련한 프롤레타리아 개미 한 마리가 바라보는 혁명주의자 두 분은,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를 제창하며,
노선은 있되 뚜렷한 대안은 없는,
욕하면서 닮는다는 속담을 그대로 실천하는 듯,
같은 혁명주의자들이지만 자신들과는 노선이 약간 다른 pd파를 무쟈게 씹어대는,
몸체는 너무나 거대해지고 뇌는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이기 힘들어진 공룡,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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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흘렀다.
위대한 혁명주의자 선배가
자신의 아버지가, 근무하던 회사를 그만두고 따로 독립을 하여, 근무하던 회사에 무언가를 납품하는데,
근로자의 사인이 필요하다 하며,
후배들을 불러모아 강제로 사인을 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민중을 외치고 혁명을 외치고 툭하면 나를 미친듯이 몰아붙이던 혁명주의자가 택한 종착역이,
결국, 그가 그렇게나 싫어한다고 주장하던,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 것이지 뭐야'라며 명령하는 악랄한 자본가였나...하는 생각에 입맛이 씁쓸해졌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렀다.
우연히 만나게 된 지인으로부터
위대한 또 하나의 혁명주의자 후배의 소식을 들었다.
무슨 일인가에 연루되어, 수배가 떨어져 도망을 다니다가 결국 붙잡혀서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몇 달만에 돌아온 그는 한손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되었고,
집 밖으로 나갈 생각도 못한채 하루 하루를 집에서 보낸다고 했다.
언젠가는 낫겠지...했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에 들은 소식은 여전히 동일했다.
몸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패배주의자에 안착해버린 그의 안일함에 화가 났고 분노했다.
그리고 다시 착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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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통해 프랑스 혁명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위대한 바스티유 습격 사건과 더불어,
위정자의 책임을 단호하게 묻고 그를 단두대에 보낸 '민중'의 힘에 감동을 있는대로 먹어버린 나는,
부모님께 졸라 프랑스 역사에 관한 책을 읽고 탐독하다,
그 후에 거듭된 역사들 - 독재자 로베스 피에르의 등장, 테르미도르 반동, 왕정 복고, 나폴레옹이라는 군사 독재자의 등장 등-에 많은 충격을 받았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중학교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나는 우는 것을 상당히 꺼리는,
가족들로부터 종종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듣는 시니컬한 반항아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다시 접하게 된 [북해의 별]은,
시니컬한 반항아에게 눈물을 쏟게끔 했다.
혁명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역사에 조용히 동참하는 사람으로 물러선 유리핀은, 그의 아내 에델라이드는,
행복해보였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너무나 행복해보였다.
유리핀 이후에 등장한 위정자들이,
그 나라를 사회주의 체제로 만들었는지, 민주주의 체제로 만들었는지 잘은 모르지만, (위정자 최고책임자를 뭐라고 불렀는지는 중요치않다.)
암튼, 그들은 너무나 행복해보였다.
'이 나라는, 프랑스가 시민혁명 이후에 거쳤던 수많은 반동과는 달리,
한 번의 혁명과 비요른 누벨에 의한 한 번의 반동이 유리핀의 명연설과 눈물만으로 모두 종결되어버렸네?'하는 생각도 들법 했지만,
난 작가 김혜린이 꾸고 있는 한바탕의 낭만적인 꿈에 기분좋게 취해버렸다.
현실은 그리 녹녹한게 아니다...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낭만적인 꿈에 같이 녹아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어버렸다.
그랬기에 작품 [테르미도르]는 내게 있어, 반격까지 가해진 충격이었고, 배반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은,
[11월의 초상]이라는 단편 한편으로 완전히 아작이 나버렸다.
왜 그런지는.... 작품 함 보시면 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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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해하는 작가 김혜린의 작품 세계는,
[북해의 별]로 대표되는 낭만기,
[비천무], [테르미도르]로 대표되는, 낭만과 현실의 거대한 벽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하는 과도기, 혹은 고뇌기,
[아라크노아]로 대표되는, 현실의 구조적인 결함과 절망에 대해 낭만적인 감성을 발휘하여 사람을 발견한 재해석기,
그리고, 마음이 불편해질만큼 현실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래서 밑바닥에 가라앉은 희망 한톨까지 낱낱이 건져올리는 현실과의 조우기... 이러하다.
(물론, 이건 작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를 수 있는,
만구 내 생각에 내멋대로 해석이지만, 나는 나의 이런 해석에 만족한다. )
다작은 아니지만,
한국 만화사에 길이 남을 굵직한 작품들을 연속으로 발표하고 있는 작가 김혜린은,
과연, 후퇴하고 있는 것일까?
혁명에 대해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작가 김혜린의 작품에는 희망이 없는가?
난 아니라는 의견에 한 표를 던진다.
아니, 올인이다.
난, 작가 김혜린이 점점 더 진화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내가, 작가 김혜린의 팬이기 때문에가 아니다.
그녀의 작품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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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혜린의 작품 속의 '사람들'-가라한, 자하랑 같은 주인공이 아니다, 그냥 사람이다-
최근의 작품으로 올수록 점점 더 디테일한 삶을 구성한다.
고생하는 수준도, 단순 고생 정도를 넘어서서 개고생 수준에 이른다.
(보는 사람이 가슴아파 죽을 지경인데, 그리는 사람은 오죽하랴...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눈물이 날만큼 반짝 반짝거리고, 생기가 넘친다.
휩쓸리지 않는 생각과 개성은 또 어떠한가. 말이 필요없다.
[북해의 별]에 등장하는 사람들-민중들, 민초들-은,
혁명 이전에는 빵 하나에 목숨 걸만큼 굶주리고,
혁명 이후에는 뭐 달라진게 없다며 투덜거리다,
비요른의 베팅 한 판에 휩쓸려 어제의 동지를 향해 무기를 들고 나섰지만,
유리핀의 한 마디에 녹아버려(나만큼 녹아버렸다 --;;)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그들이 추구했던 본질로 간단히 회귀해버린다.
그 일사분란한 행동감은,
작품 자체로 놓고 보면 상당히 감동적이지만,
현실로 대비해볼 땐,
도대체가, 이견 하나 없이, 100% 완벽하게 싸그리 돌아서버린다는 것이 무서울 정도다.
(이거야말로, 집단 세뇌 아닌가? --;;;; )
이번에는 [불의 검]을 살펴보자.
청산녀는,
원수의 아이를 가진 아라를 보면 짜증이 나면서도 가슴이 아프다.
허리 아파하는 아라를 위해 다루를 대신 업어주고 달래주지만,
바리가 아라를 대싢 끌려가는 꼴을 보고는 다루를 아라에게 던지며 울고만다.
나중에 아라를 전폭 지지하게 되지만,
원수들에게 당하고 나서는 착한 남편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냥 정신을 놓아버린 '척'한다.
이름도 못갖춘 여인들은,
똑같은 꼴을 당했지만, 각각의 생각들이 다 있다.
세상이 미쳤다고 한탄하는 여인도 있지만,
어떤 여인은 살겠노라며 눈물을 흘리며 다짐한다.
가라한이 얼마나 뛰어난 용사인 줄 다 알면서도,
제백의 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죽으나 사나 그를 믿으며 목책을 꾸미는데 여념이 없는 사람도 있고,
경고하는 사람도 있다.
가지가지다 싶을만큼,
참으로,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 그러나, 입장을 고려해보면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 얘기를 줄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대체, 일케 풀어헤쳐서 끝을 언제 볼 수 있겠나....하며 작가를 원망하고 싶은 심정이 들 지경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작가 김혜린은, 작가 김혜린의 작품은, 그리고 작가 김혜린의 작품 속 사람들은,
'진보'냐 '보수'냐 하는 노화된 정체성과 색깔 구분 이전에,
하루 하루 그 감성과 이성이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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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울 나라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지는걸 보면, 거의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 수준이고,
덕택에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겁이 더럭 나고,
강수량은 넘쳐나는데 물부족 국가라며 물 아껴쓰자고 캠페인 벌이는 것이 못마땅하고,
해마다 태풍 닥친다는거 뻔히 알면서도 외양간 고칠 생각은 안하는지 못하는지 맨날 성금만 모아제끼고, 모아제끼는건 이해한다 쳐도 그 모은걸 어디에 어케 쓰는지, 알 권리가 있는 사람들에겐 태연하게 쌩까고,
자발적으로 내야하는 민간단체 적십자 회비를 위해 공무원이 나서고,
있는 놈들 탈세하는 건 못본 척 하고, 가뜩이나 없는 것도 많은 월급쟁이 회사원을 무슨 봉으로 아는지 무슨 무슨 연금에 세금 꼬박 꼬박 미리 빼놓고선 나중에 제대로 돌려주지도 않고,
연봉 3000만원짜리 신입사원 3000명을 뽑을 수 있는 돈을 한 정당에 차떼기로 갖다바치는 미련한 회사의 사주가 있고,
그런 사주를 비웃기라도 하듯, 디지털 세상에 맞게 책 한권 분량의 채권으로 얌전히 갖다바치는 사주가 있고,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대통령 이전에 당선된 국'개'의원 193마리가, 지들이 뭔데 함부로 탄핵시키고 '살았다 만세'를 부르짖는 꼴을 생방송으로 지켜봐야 하고,
'그래도' 식의 지역주의 정서에 딴나라로 보내버려야 할 인간들 다시 죄다 뽑아준 그 정서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는데,
이 나라를 좋아한다는 건, 좋아할 수 있다는건 그야말로 대단한 용기요, 넌센스다.
그러나, 이 나라를 떠나서 이민가겠느냐...고 묻는다면,
아직까지는 no 다.
남아공에 이민 가면 월 100만원으로 왕족처럼 살 수 있네, 중국 가면 뭐가 어떻네...말도 많고 유혹도 많지만,
이민을 가고 싶은 생각은, 아직까지는 없다.
이유도 딱히 없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지만, 그냥 싫다. (귀차니스트 정서때문일까? --;;;; )
잘은 모르지만, 아마, 나같은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된다.
비록 나와 많은 것이 다르지만,
이 나라, 참 마뜩찮고 못마땅하지만,
외면해버리고 모른척해버릴 수는 없고...
계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무작정 미워할 수 만은 없어하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레닌이었던가?
한 명의 천 걸음보다 천 명의 한 걸음을 부르짖던 사람이...
난, 나와 같은 그런 사람들과 그냥 조용히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떼놓으며 진화하고 싶다.
'진보'가 아닌, '진화'말이다.
그런 나를 향해, 위대한 혁명주의자-위에 얘기한 나의 선배와 후배 같은 사람들-는
'너같은 회색주의자가 선택할만한 타협'이라며 비웃을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 개미를 향해,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천년 만년 다람쥐 쳇바퀴돌듯 돌 것'이라며 강의하듯 강조하고,
다시금 혁명의 당위성을 프롤레타리아 개미의 머릿 속에 꾸깃꾸깃 집어넣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최.소. 한.
혁명에 대한, 구조 변화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인해 방방 뛰어다니다가,
어떤 계기에 의해 자신의 사고방식 속에 이루어져버린 반동을 겪은,
그리하여 너무나 야비하게, 혹은 무기력하게 변해버린 당신들은 나에 대해 함부로 지껄이지 말라고.
쳇바퀴가 천년 만년 유지되지도 않을 것이고,
내 대에 안되면, 내 아이의 대에, 내 아이의 아이의 대에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내 아이에게, 내 후대의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더 좋은 삶과 환경과 사람들을 주고싶다는 열망과 책임감으로,
우공이 산을 옮기듯 노력한다면...
이러한 나와, 그리고 나와 다른,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너무나 닮은, 그런 사람들의 한걸음씩의 진화가,
먼 훗날에는, 혁명으로 불리지 않을까...?
난 그렇게 믿고 있다.
작가 김혜린 역시 그리 믿고 있을 것이라며, 한번 씨익 웃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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