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게시판

오늘은 비록 오래 전에 나온 작품이지만, 그래도 곱씹을 가치가 있는 작품을 다루려고 한다(참고로 내가 직접 단행본을 사서 읽은 작품이다).

김혜린 화백의 과학 만화(사실 ‘공상과학물’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번역이고, 정확한 번역은 ‘과학물’이나 ‘미래물’이어야 한다. 내가 읽은 과학소설을 쓰는 한국인 여성 작가의 글에서 이런 지적이 나온다)인『아라크노아』에는, ‘블라디미르’(줄여서 ‘블라디’)라는 가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가수는 캡틴 아라크네, 그러니까 ‘리안’과 친한 사이였고, 어느 날 만신창이가 되어서 아라크노아의 사무실에 찾아왔는데, 아라크노아의 멤버들(주인공인 ‘지나 박’을 포함한 사람들)은 그를 위해 그가 화성에 사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공연)를 마련해 준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억압하는 체제를 비판하고, 그 뒤 죽음을 선택한다.

16년 전(20대 초반), 내가 이 만화를 처음 봤을 때는 이 에피소드가 별로 마음에 안 들었는데(‘블라디는 달아났어야지, 왜 스스로 목숨을 버려?’라고 생각했던 점이 한몫했다), 이 나이(30대 후반)가 되어 만화의 내용을 곱씹고 에피소드를 다시 돌아보니, ‘아,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그가 죽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가 마지막으로 무엇을 노래했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노랫말을 다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지금 내 가슴과 머리를 가장 거세게 후벼 파는 노랫말은 소개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가장 많은 죄를 지은 자가,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서, 사소한 부분은 틀릴 수도 있다. 양해를 바란다. 그리고 지적해 주시길!)

이 만화를 맨 처음 읽었을 때는 이 노랫말에 시큰둥하게 굴었는데, 지금 다시 노랫말을 들어보니 블라디가 꼭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다.

맞다. 이 세상은, 현실세계는, 이 지구는 ‘착한 사람은 복을 받아서 잘 살고, 나쁜 놈은 죄 지은 만큼 처벌받는다.’는 법칙이 안 통하는 곳이다. 역사를 보면, 그리고 현실세계를 보면 분명히 나쁜 짓을 저지르고 살았는데도 벌을 받기는커녕 떵떵거리며 잘 사는 사람들이 많고, 그들은 죽을 때에도 편하게 죽으며 자식이나 손자손녀나 부하에게 많은 것을 나누어준다. 그들의 자식이나 손자손녀는 선조의 나쁜 짓에 대해 어떤 죄책감도 안 느끼거나, 그 일을 합리화하고 피해자에게 - 또는 피해자의 자손에게 - “침”을 뱉기도 한다. 한마디로 현실은 동화나, 영웅담이나, 할리우드 영화나, 디즈니 만화가 아니란 말이지. 블라디는 그걸 뻔히 알기 때문에 실망과 분노와 절망과 (이상과는 다른) 현실을 담아서 노래를 한 건 아닐까?

그는 “가장 많은 죄를 지은 자가,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는 말을 할 때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이 노래를 듣는 당신은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지켜봐야 해. 그리고 이 현실을 따지고 이 현실과 싸워야 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나는 비록 죽지만, 당신은 내가 가르쳐주는 현실을 알고 그 현실을 바로잡아야 해.’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어쩌면 그는, 자신을 불태우며 빛을 밝히는 초의 심지처럼 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낸 빛으로 “가장 많은 죄를 지은 자”들이 우글거리는 현실을 봐야 하고, 그 뒤에는 블라디의 뒤를 이어 초 심지가 된 뒤, 그 “죄를 지은 자”들, “가장 오래 살아”남은 윗사람들을 비추며, 그들에게 물음표를 붙이고, 그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그렇게 해야 노래를 남기고 죽은 블라디에게 부끄럽지 않을 테니까.

글이 너무 길어졌다. 만화에 나오는 명대사 하나만 더 인용하고 (글을) 매듭짓자. “이런 말(블라디의 노래에 나오는 노랫말 - 옮긴이)에 귀를 기울이는 (그러니까 블라디의 노래를 듣는 - 옮긴이) 당신도 조금은 ‘미친 놈’이지!” (하하하!)『아라크노아』를 그려주신 김혜린 화백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 ‘미치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말을 되뇌며, 스트레스를 술 대신 녹차와 홍차를 마시며 푸는 김혜린 화백의 애독자 돌베개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