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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에벤키 족장님.
14년 만에 족장님께 보내는 새 편지를 씁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혼동강가는 동북쪽에 있으니 이곳(서울. 나무바다의 남쪽)보다는 더 춥겠지요? 부디 겨울을 잘 보내실 수 있기를 빕니다.
먼저 해조 공녀와 부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부디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될 때까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사세요. 족장님은 행복을 누리실 권리가 있습니다.
사실 14년 전에는 족장님이 어떻게 되실지 몰라 조마조마했는데, 솔꽃 아리하에서 산마로 형(가라한 아사)과 마주쳤을 때 씨익 웃으면서 왼손을 든 모습을 보니 온갖 근심과 걱정이 저절로 사라지더군요. -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 저는 족장님이 마리한을 뵈러 포타 하슬라로 가겠다고 밝히실 때에도 별 걱정을 안 했어요.
마리한은 족장님이 처음에는 카르마키를 돕다가 나중에는 웅고르바트를 죽이고 아무르의 편으로 돌아서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가라한과 아벌한을 통해 족장님에 대한 것을 다 전해들었을 테니 족장님을 가혹하게 대할 리가 없거든요. 뭐 마리한의 신하들은 그렇지 않겠지만요. 만약 그들이 족장님을 가혹하게 대한다면 - 또는 매섭게 추궁한다면 - 그냥 정직하고 솔직하게 카르마키군(軍)과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밝히고 그 뒤 에벤키족이 아무르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를 덧붙이세요. 그래도 그들이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면 그 땐 그냥 ‘저 사람들에게 시간을 주자. 나중에는 이해하게 될 거야.’라고 판단하고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마세요. 그들이 화를 낸다 해도 마리한이 족장님을 이해한다면 되는 거니까요.
다른 이야기도 할게요. 저는 족장님이 아무르와 카르마키의 전쟁이 끝날 때 “카르마키 야장들”을 붙잡아 두신 건 정말 잘 하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벤키 족을 강하게 만들겠다는 족장님의 다짐을 실천하려면 무엇보다도 철기를 손에 넣어야 하니까요. 철기는 무기지만 동시에 사냥이나 고기잡이나 나무 베기나 물건 만들기나 여름지이(농사[農事]를 일컫는 순우리말)나 수레 만들기에 쓰이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결코 가볍게 넘길 수가 없지요. 그것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세력을 확장”하셨으니 이것이야말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에벤키의 힘이 절우부(아무르의 아홉 부部 가운데 왜 하필이면 절우부인지는 족장님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에벤키가 강해지기를 빕니다(굳세고 강해진 에벤키를 생각하기만 해도 기분이 좋네요).
사족을 달자면 저는 족장님이 온갖 트집을 잡으며 족장님과 에벤키족 전사들을 괴롭히고, 나중에는 “건방진 야만족”이라는 낙인까지 찍은 웅고르바트에게 “진짜 야만이 뭔지 보여주마 …… !”라고 외치며 그를 도끼로 찍어죽이실 때 정말 통쾌했습니다. 족장님이 “불칼”에 걸맞는 “전사”라는 걸 알 수 있었거든요. 저도 족장님처럼 저를 깔보고 막 다루려고 하는 힘센 나라의 윗XXX들 - 그리고 그 나라의 씨알들 - 과 맞서 싸우고 싶어요. 그러니까 … 족장님을 본받고 싶단 말이죠. 제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셔서 - 본보기를 보여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걱정이 되어서 말씀드리는 건데 … 가라한과 아벌한과 마리한이 아무르의 씨알(백성百姓을 일컫는 순우리말)들에게 족장님과 공녀의 혼인에 대해서 더 이상 따지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더라도, 씨알들이 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족장님께 시비를 걸거나, 욕을 퍼붓거나, 창칼을 들이댈 지도 모릅니다.
그럴 땐 머뭇거리지 말고 큰 소리로 반박하세요. “우린 서로 사랑해 혼인했고, 공녀는 가라한과 정식으로 헤어진 다음 나와 혼인했어. 그게 뭐가 문젠데? 누가 너희한테 내 개인적인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따질 권리를 줬느냐? 나를 헐뜯고 욕하는 것은 곧 너희들의 공녀의 남편을 헐뜯고 욕하는 일인데 너희는 그 일이 옳다고 생각하는 거냐?” 라고 말씀하시면 됩니다(칼을 뽑으면서 으르렁거리는 자 앞에서는 주저하지 말고 활을 겨누세요!). 정 안 되면 족장님이 에벤키가 아무르 피난민들을 많이 받아준 일이랑, 카르마키가 에벤키족 전사들을 도륙하려고 한 일이랑, 전쟁에서 에벤키가 아무르를 도우면서 한 일도 내세우세요. 이 일로 말다툼을 할 때에는 절대 물러서지 마세요. 물러서시면 지는 거니까요(때로는 세게 나서야 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정 ‘내 편’이 모자란다고 여긴다면 저한테 도와 달라고 하셔도 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전적으로 족장님 편이니까요. 만약 불러주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달려와 족장님을 도울 겁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쓰려고 족장님이 예전에 하신 말과 행동과 생각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족장님이 산마로 형과 싸우고 난 뒤 군영으로 돌아가면서 ‘그를 조롱했지만 조롱받아야 할 건 나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제 눈과 마음을 사로잡더군요.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족장님은 분노하셔야 할 까닭(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 그것도 자기보다 힘이 세고 부유한 남자와 혼인하기 위해 강제로 떠나야 했던 일/에벤키 족에게 “궁할 땐 형제라더니 이제 와서는 다시 군림하려 하는” 아무르 사람들/해조공녀와 혼인하고는 그를 내버려두고 아라를 찾으러 치치누르까지 간 가라한 아사)이 있었고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누구라도 이성적으로 굴진 못했을 테니까요. 저라도 족장님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앞뒤를 살피지 않고 분노했겠죠. 그러니 -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 저는 족장님을 “조롱”하지 않아요. 오히려 이해해요.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괴롭히지 마세요(소서노 신녀님이 하신 말씀).”라는 말씀을 족장님에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족장님께 따뜻한 녹차 한 잔과 약과(藥果)와 감귤을 - 또는 사과를 - 대접하면서 족장님에게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부디 제 말이 족장님께 도움이 되었기를 빕니다.
날은 어둡고 잘 시간이 되었으니 이제는 붓을 놓아야겠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허접한 글’이라며 웃으실 거라고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래도 편지를 보내드리는 것이 안 보내드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겨 이렇게 편지 한 통을 썼습니다. 나중에 불쏘시개로 삼으실지언정 그래도 읽어보고 나서 그렇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담아 인사드립니다.
- 에벤키 족장님에 대한 존경과 흠모를 버리지 않은 돌베개가 드림
* 덧붙이는 글(추신) :
의형(義兄)이자 맹우(盟友)인 산마로 형과 사이좋게 지내시는 것 같아 기쁩니다. 사실 산마로 형은 어릴 적에 카르마키의 손에 친형제를 다 잃고 혼자 살아남았죠. 족장님은 족장님을 형제로 여기지도 않는 배다른 형제들과 싸워 이긴 뒤에 족장이 되셨고요.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친형제를 잃은 뒤에 서로를 만났다는 닮은 점이 있군요. 그리고 오해가 풀리고 하마터면 원한을 쌓을 뻔 한 일을 좋게 풀어 의형제를 맺었고요. 친형제를 잃은 뒤 의형제를 얻었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피가 섞이지 않았는데도 식구나 친척보다 더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그것을 유지하기도 하지요. 저는 두 분의 만남도 그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그 우애를, 그 우정을 버리지 마세요.
아, 그리고 단목다루 공자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세요. 그에게는 어버이의 사랑 뿐 아니라 의숙(義叔)과 의숙모(義叔母)의 사랑도 필요합니다. 비록 그의 아버지인 산마로(가라한 아사)가 그를 지켜주긴 하지만, 푸른 용부의 씨알들 - 아니 다른 부의 씨알들도 마찬가지겠죠 - 은 그를 “오랑캐 사생아”라고 욕하고 다녀요. 그러니 그에게는 제 3자가 베푸는 사랑, 조건없이, 부채의식 없이 베푸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를 의(義) 조카로서 사랑하되, 동정하지는 말아주세요.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건 아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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