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일시: 1999/11/13 오후 11:52
게시자: 돌베개
제목: 누가 누런 용龍을 보았는가? - 제백,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는 악역들 가운데서 (웅고르바트와 더불어) 가장 불쌍한 악역이다.
온구트는 잔인하다는 악명(!)을 똑똑히 아로새기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빴
고, 우르판은 비록 적이었지만 용감하고 기품 있고 나라를 걱정하는 뛰어
난 전사이자 전략가였으며, 카라는 이 세상의 여인들을 대변하고 그들을 감
싸안으며 불합리한 세상에 반기를 든 여왕인데(악역 가운데서 내가 가장 좋
아하고 존경한다) 그대는 뭔가?
수하이 바토르는 불행한 과거가 있고, 그 자신도 억눌리면서 살았으며 역사
가 강요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공감이 간다. 하지만 그대는?
우르판처럼 적극적으로 싸우지도 않고, 카라처럼 부조리에 반기를 들지도
않고, 수하이 바토르처럼 난폭하게 굴지도 않는다. 도대체 하는 일이 뭔
가? 그냥 혓바닥이나 굴리고 이간질이나 시키기? 아니면 아무르족의 배신
자 거루처럼 자기만의 세력을 따로 만들고 싶어하는 정치가인가? 나는 도무
지 당신을 알 수가 없다.
말하라, 제백. 누가 치우蚩尤의 아이들(아무르족)을 죽이라고 명령했느냐?
그들의 손발을 잘라 버리고 서로 싸우게 부추기라고 했더냐? 아니면 뭔가,
오랑캐끼리 싸우다 죽으면 그 꼴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웃으려고 하는가? -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그대는 환자다. 머리 속이 썩어빠진 환자다. 자기 나라 이외에는 다른 나라
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오랑캐는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그
대는 남을 정복하지 않으면 정복당한다고 믿는 모양이다. 정말 우습다.
그대는 입으로는 카르마키가 야만인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대가 더 뻔뻔
하고 야만스럽다고 생각한다.
마치 백인들이 정복을 하는 동안 미 원주민들이 사라져갔던 일처럼, 그대
의 나라가 정복한 땅에서는 민족이 사라지고, 그들의 노래가 사라지고, 그
들의 말이 사라지고, 그들의 이야기가 사라져 버린다. 그들의 얼굴도, 그들
의 목소리도 깨끗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들을 죽인 뒤에 그대는 자기나라 사람들을 심어다 놓는다. 그러면 그들
은 무럭무럭 자라서 그나마 남아있던 옛 주인들을 밀어내고 아예 자리를 박
아 버린다.
그대는 좀처럼 죽지 않는 독초를 애써 씨뿌리고 가꾸는 사람이다. 누런 땅
에는 독초의 씨앗들이 넘쳐나는 모양이다. 그대가 아무리 씨를 가져와도 씨
앗이 줄어들었다는 소리를 못 들었으니 말이다. 그대는 독초들을 `문명화
된 백성`이라 부르며 금이야 옥이야 하고 돌본다. 이게 `왕도王道`인가? 왕
화王化란 말인가?
마치 구렁이처럼, 그대는 삼키기만 하지 토해낼 줄은 모른다. 구렁이가 아
무리 삼켜도 배가 터지지 않듯이, 그대도 아무리 먹어치워도 배부르다고 말
하지 않고 계속 삼킬 궁리나 한다. 그러면서 "나는 아무런 욕심이 없고 이
기적인 궁리도 하지 않는다. 다만 올바름을 알고 행하려 할 뿐이다."고 외
친다. 내가 그 말을 믿으란 말인가? 왜? 아무르도 먹이로 삼고 싶어서?
그대는 말한다 : "우리의 법을 따라라. 우리의 법이 아니면 아무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이렇게도 말한다 : "너희들은 우리의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의 궁전이, 우리의 향로가, 우리의 책이 너희들의 숲보다, 너희
들의 활과 말보다, 너희들의 옛날 이야기보다 값지다. 그러니 너희들의 것
을 버려라. 모두 우리식으로 바꿔라."
하지만 내가 왜 그걸 따라야 하는가? 오랑캐와는 다르다는 당신들은 죄인
이 죽으면 그 고기로 국을 끓이고 젓갈을 만들지 않는가? 그래 책을 많이
읽고 법을 잘 알아서. 태어날 때부터 `착하고 훌륭해서` [오랑캐]를 희생제
물로 바쳐서 제사를 지내고 고기를 개들에게 던져 주는가?
`군자답게`, `문명인 답게` 군다는 당신네 남정네들은 왜 오랑캐 여인을 겁
간하고 아이들을 죽이는가? 오랑캐는 사람이 아니라면서 왜 첩으로 데리고
살며 농락하는가? `군자`는 짐승의 암컷과 관계를 가져도 된단 말인가?
추운 곳에서는 살지도 않는 당신들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쓸데없이 아무르
의 마리한과 여러 사람들에게 화족식 치마옷을 입으라고 하느냐? 화공에게
화족 옷을 입은 내 모습을 그리라고 하고는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중화의
은혜(?)를 입어서 오랑개들까지 스스로 중화의 법을 따르고자 합니다. 이
그림을 보십시오. 오랑캐가 중화의 옷을 입고 있지 않습니까?" 라고 떠들면
서 내 이름을 짓밟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줄 아는가? 나는 너희
가 생각하는 만큼 바보가 아니다!
활을 버리라고? 말도 타지 말라고? 그래놓고 그것들을 다 거두어 가려는
게 분명하다. 만약 우리가 시키는 데로 하면 다음에는 당신들이 - 우스꽝스
러운 긴 옷을 입은 채로 - 우리의 말을 타고 우리의 활을 쏘면서 우리를
칠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나도 사라져 갈 수 밖에 없으리라. 나는 차라리 시
원하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이곳 숲과 벌판에서 살고 싶지 텁텁하고 답답
한 누런 땅에서 살고 싶지 않다. 나에게 너희의 법을 강요하지 마라.
똑똑히 말해두겠거니와 만약 카르마키가 무너진 뒤에 너희가 우리 땅에 손
을 뻗치고 우리 머리위에 올라가려고 하면 나는 카르마키와 싸울 때 쓰던
창을 그대로 제백, 그대에게 겨눌 것이다. 그리고 아무르왕 천궁이 한 말
그대로 "초원의 아들"인 본성을 드러내어 "서슴없이 피를 즐길" 것이다. 중
원의 법도가 어쩌니 하고 거만떨지 마라. 네 나라는 먼 곳에 있고 내 창은
그대 가까이에 있다. 고슴도치가 되기 싫거든, 창구멍 나기 싫으면 우리를
그냥 내버려둬라.
다시 만날 때에도 못된 거만한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너를 가만두지 않겠
다. 내 말을 마친다.
덧붙여서 : 나는 그대들이 오랑캐 여인을 데리고 사는 일을 보았다. 화족
가운데 누구도 그걸 시비삼지 않는다. 그런데 왜 아무르인이 화족 여인을
사모하면 용서할 수 없다며 날뛰는가? 이 땅의 법칙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베풀어지는데 그대가 하는 일은 괜찮고 우리가 하면 안되는가? 우스워서 말
도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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