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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이란 달은 그야말로 저주받은 달이다.
왜냐.. 다른 달에는 최소한 하루 이틀 정도는 있는 일요일 이외의 공휴일이
11월 한 달 만큼은 유독 없기 때문이다.
평일이라면 학교에, 회사에 감으로써 빡빡한 하루 일과를 보내야 하는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저주받은 달이라고 불리울만 하다.
[11월의 초상]은,
11월만큼이나 오랫동안 나로부터 많이 무시당하고 천대받고 외면받았던 작품이며,
오랫동안 나에게 김혜린 선생님 작품 중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작품,
김혜린 선생님이 실수로 탄생시킨 작품,
김혜린 선생님의 '저주받은 작품'으로 각인되었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김혜린 선생님의 작품 [11월의 초상]을 만나게 된 것은, [테르미도르]를 본 후 찜찜한 마음 한 구석을 달랠 길 없어 혼자 광분하고있던,
11월을 조금 앞둔 10월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1월의 초상]은, 1980년대, 데모가 한창이던 대한민국 서울 어디에선가 살아가던 한 여자와 한 남자,
그 둘의 영혼이 어떻게 만나는가에 대한 소담스런 에피소드 한토막 같은 작품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대강 이러하다.
(이 작품을 보신, 혹은 갖고 계신 분들도 계시고 다른 이견을 지닌 분들도 계시겠지만 일단, 제 기억에 준하여 쓰도록 하겠습니다 ^^)
여자 주인공은, 화랑에 다닌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아니고,
그 화랑의 주인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화랑을 직장으로, 그 화랑에서 심부름도 하고 경리 비슷하게 일하는,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그저 평범한 여자다.
그 여자는 어느 날부턴가, 매일 매일 화랑 앞을 서성거리며 화랑앞에 전시된 초상화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고 가는 남자와 매일 마주치게 된다.
여느때처럼 정부를 비판하는 데모가 일어나고,
가게문을 닫던 여자는, 그 데모의 현장 한가운데서 목소리높여 구호를 외치고 뛰어다니다 다치게되는 남자를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며칠 후,
여자는 화랑 문을 닫다가 화랑의 여주인과 사귀고 있던 사업가가 술에 취해 들어와 봉변을 당할 뻔 하지만,
때마침 들어온 화랑의 여주인으로 인해 위기는 모면하지만 수치스럽고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또 며칠...
심란한 가운데,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않게 되자 그 남자를 어렴풋이 그리고 있던 자신을 깨닫게 된 여자...
그 결말은,
머리와 손에 붕대를 감고 다시 화랑앞에 나타난 남자와 마주치고,
'나는 지금까지 그림을 보러왔던게 아니라 당신을 보러왔던거다'라고 수줍게 고백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
두 사람의 옆 모습 전신이 하얀 배경 속에 소박하게 새겨진 커다란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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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다뤘던 작품인 [북해의 별]의 결말 부문,
혁명에 참여하며 치열하게 살아갔던 사람들이 고즈넉이 늙어가며 평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아름다운 이상향을 보며 혁명의 끝과 결말에 대해 아름다운 환상을 품었던 내 입장에서,
김혜린 선생님이 [테르미도르]에서 보여준 유제니의 죽음은,
일종의 충격이요, 배반이었다.
[테르미도르]는,
혁명의 종결이 [북해의 별]에서처럼 유리핀의 진심어린 연설 한번과 눈물로 흠잡을데 없이 완벽하게 맺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낭만적인 환상에 대해
'꿈깨라!'고 외치며 찬물 끼얹고 경종을 울려댐으로써 나에게 경계를 불러일으킨,
바로 그런 작품이다.
지금도 [테르미도르]를 생각하면
왠지 모를 앙금이 가슴 속 깊이 때끈하게 가라앉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학교와 집까지의 거리가 엎어지면 코닿을만큼 가까이 있는 통에 용돈모으기가 여간 어렵지 않던 내가 고생고생끝에 르네상스를 사서 그 안에 있는 [11월의 초상]을 처음에 대면한 순간,
그 때 든 그 감정의 정체는 '배신감'이었다.
왜냐...
바로, 그림과 내용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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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이미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11월의 초상]은,
뭐랄까...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를 보는 느낌,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는 느낌이랄까...
우리집 앞마당에서 여느때처럼 일어난 평범한 일들을 가만히 관찰하는 것같은 기분이 들만큼,
화려한 컷 분할 없이, 연출 없이, 예쁜 주인공도 없이, 그냥 흘러가는 물만큼이나 잔잔하게 그려진 그런 작품이다.
물론 그 안에도 [북해의 별]이나 [비천무], [테르미도르] 못지 않은 치열함이 숨쉰다.
남자 주인공이 시위대에 앞장 서서 역동적으로 뛰어가는 장면,
겁간당할뻔한 위기에서 구해지긴 했지만 수치와 당혹스러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여자 주인공의 표정과 화랑 여주인의 표정...
그런 것들을 보면 분명히 그 안엔 김혜린 선생님 특유의 치열한 삶의 흔적이 살아있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그 장면들이 내가 보았던 선생님의 이전 작품과 내가 즐겨 찾아 보던 만화들과는 달리,
그리 예쁘게 그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예쁘게'라는 말은, 당시의 내 기준으로 예쁘게, 지금의 내 기준으로선, 만화 속에서 예쁘게 그려지는 눈동자의 크기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사료되는 화이트칠, 꽃 배경과 역동적인 자선, 멋진 포즈, 기타 등등이다. )
조금 예쁘게 그려진 컷과 인물은 단 하나,
표지였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잘 안나는 여자 주인공이 다니던 화랑에 걸려있던 초상화의 주인공이었지, 작품의 주인공은 절대 아니고,
그나마도 [북해의 별]이나 [비천무], [테르미도르]를 떠올리며 비교해본다면, 이게 과연 표지가 맞을까 의심이 갈 정도로 평범했다.
그저, 펜으로 그린 정밀묘사 정도로 받아들여질만큼, 그만큼 평범하게 보여지고 받아들여졌다.
어디 그뿐이랴.
주인공들도 더할나위 없이 평범하다.
아니, 평범하다못해 초라하다할만큼 단촐하고 소박하다.
순정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배경, 화려한 자선 배경 하나 제대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여과없이 그대로 다 담아낸 양, 그리 많은 조화와 순정만화다운 낭만스러운 극적 구성을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작품이라는 것이다.
화려한 배경 속에 화사한 주인공들이 나와 멋드러진 폼으로 읊어대는 멋진 대사들과 화려한 구성에 낯익어있고,
예쁜 주인공들이 많이 나오는 만화책을 모으고,
중간 중간에 있는 예쁘고 멋있는 장면들을 카피해 책받침으로 쓰고 교과서를 포장하곤 하는데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있던,
그리고,
[북해의 별]의 아득한 꿈같은 결말, [비천무]의 가슴저리는 사랑의 끝에 취해 헤롱거리고,
틈틈이 부록으로 할리퀸 로맨스 등의 신데렐라 컴플렉스가 가득찬 소설을 수업시간 중간 중간 즐겨읽던 고딩 출신 성분을 지닌 나로선,
별로 예쁘지도 않은 주인공이 나와서
멋있는 장면 하나 없는 가운데
그냥 그냥 평범한 사람과 함께 사랑의 예감을 꿈꾼다고 외치는 이 작품에 절대로 동조할 수 없었다.
만화 속에서 그려지는 사랑이라 하면 모름지기,
난세 속에서,
명문 태생의 화려한 혈통을 지닌 선남선녀가
운명 혹은 인연에 의해 만나 한 눈에 반하게 되는 것,
그리하여 그 한눈에 반함이 숙성하면서 벌어지는 온갖 음모와 권모술수를 헤치고,
해피하게든 언해피하게든 우쨌든 엔딩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여겨졌던 내 고딩 시절, 바로 그때에...
이 작품이 김혜린 선생님의 작품이라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 배신감이 오죽이나 컸으면, '이거 정말 김혜린 샘이 그린거 맞아? 문하생 시켜서 페이지 때우려고 대강 그린거 아냐? '이런 말을 했을까?
지금이야 이 작품과 [우리들의 성모님]이 최근 김혜린 선생님 특유의 화풍으로 일컬어지는 사실적이고 서정적인 화풍 중 사실주의적인 면모를 담아내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이 작품이 [비천무]의 정한과 [테르미도르]의 허망함을 극복하고 [아라크노아]의 따뜻한 치열함으로,
그리고 [불의 검] 시대를 배경으로 살아가던 수많은 민중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작품의 분수령을 이루는데 얼마나 큰 기여를 했었을지 이해하며,
'그랬구나, 그랬었구나...'하는, 드라마 "가을 동화"에서 히트쳤던 은서의 대사를 따라하며, 고개를 끄덕거릴 정도는 될만큼 머리가 크고 나이가 들었지만...
도로변 발끝에 채이는 잡초 풀잎 하나, 잡초 꽃잎 하나에도 사랑은 있다고,
몸은 흙탕물 속에서 뒹굴어도 맘 속엔 예쁜 달맞이꽃 같은 어여쁜 사랑 하나 숨어있다고 외치는 [11월의 초상], 그 보드라운 속살같은 메시지를 이해하기엔...난 너무 어렸다...
책이 너무 많아져서, 어머니의 말없는 압력에 못이겨 책을 한권씩 두권씩 갖다버릴 때,
제일 먼저 [11월의 초상]이 있던 르네상스를 버린 이유도,
내 기준에 이 작품을 내가 그때까지 보아왔던 김혜린 선생님의 작품과 다른 분위기, 내게 익숙했던 만화와도 다른 분위기에 적응 못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 아마도 바로 그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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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다시 보고 되새기게 된 것은,
93년 정도쯤이던가...[북해의 별]이 팀매니아에서 다시 재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보수동에 나갔다가 구입에 실패하고 터덜거리며 돌아오다 들렸던 만화가게에서였다.
지금은 없어져 그 소식은 며느리도 모르지만,
그 만화가게 주인 아저씨는 꽤나 극성스런 만화팬이었던 거 같다.
희귀본으로 알려진 "아홉번째의 신화"가 있는가 하면,
단행본으로 보기 어려운 각 작가들의 작품을 분철하여 총총이 모아놓았으니 말이다.
그 곳에서 나는 [아홉번째의 신화] 두권(1호와 2호)과 빳빳한 달력으로 포장된 채 스테이플로 콕콕 찍혀져 잡지 크기 그대로, 3권 분량으로 모아진 [아라크노아], 그리고 [아라크노아] 뒤에 분량을 채우기 위해 넣어진 [11월의 초상]을 보았다.
보고 나선... 왠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유레카...
이 단어가 툭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과 함께 입에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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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린 선생님 단편집이 대원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그 작품집에 제발, 부디, [11월의 초상]이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전설로 회자되던 [우리들의 성모님]을 확인하게 된 것만 해도 어디냐 하며, 그렇게 마음을 달랬다.
벌써 7월... 곧 있으면 11월이다...
요즘이야 [11월의 초상]에 그려진 것 같은 시위도 거의 없고, 또 있다 해도, 그 규모나 구호의 외침이 작아졌지만,
그래도 세상사는 치열함이야 어디 작아지고 달라졌겠는가.
그리고 그 안에 살아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나누는 평범하기에 더욱 비범하고 낭만적인 사랑과 세상살이 또한 말이다...
7월에서 이틀을 갓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길디 긴 호흡을 내뿜고 있는 [11월의 초상]에 관한 꿈을 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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