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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정말 일어나기 싫은 걸 억지로 일어나서, 미리 챙겨둔 짐을 가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사실 전 별로 여행을 떠나고 싶지 않았는데, 집안 어른들이 한 달 전부터 제게 “여행 좀 다녀와라!”라고 닦달하셔서,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문득 제가 어릴 때 - 그러니까 10대 초반일 때 - 대전에서 엑스포[박람회]가 열렸다는 것이 떠올라[대전 엑스포는 서기 1993년에 열렸음. 본인은 그 때 초등학생용 신문에서 엑스포가 열렸다는 기사를 읽었고 엑스포 마스코트인 ‘꿈돌이’가 나오는 만화도 보았으며 TV에서 엑스포를 기리는 노래도 들었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다] ‘그 때 가 보지 못했으니, 이번엔 한번 가보자! 엑스포가 열린 곳에 공원이 남아있으니 가서 보면 옛 추억도 되새길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전 엑스포 과학공원에 가겠다고 하고 한 달 동안 준비도 안한 채 가는 걸 미루었죠.
그러다가 며칠 전, ‘더 이상 미루면 안되겠어!’라고 판단하고 대전 엑스포 과학공원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모은 뒤, 대전까지 가는 데 드는 비용, 숙박비, 식비, 대전 안에서 쓸 교통비, 공원 입장료를 모두 조사해서 여행 비용을 계산했습니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더니 어른들이 “이거 하나만 보고 오겠다고? 나머지 시간은 뭘로 때울 건데? 볼 거 또 있나 찾아봐!”라고 하셔서, 머리를 쥐어짜다가 문득 10년 전에 대전에 화폐박물관이라는 박물관이 있다는 기사를 읽은 게 떠오르더군요. ‘좋아, 그것까지 보고 오겠다고 대답하면 더 이상 묻지 않겠지.’라고 생각하고 화폐박물관도 보고 오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그 때는 ‘과학공원만 보고 와도 충분할 텐데 다른 것까지 봐야 해?’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제 ‘일’은 두 곱절로 늘어났습니다. 화폐박물관의 위치와 입장료, 가는 길, 교통비까지 따로 알아야 했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준비를 다 하고 난 뒤 여행 가방을 미리 챙기고 나서 잠자리에 든 겁니다)
동서울 터미널로 온 뒤 고속버스를 타고 대전에 있는 복합 터미널로 가는데, 어찌된 일인지 버스표 값이 10400원이 아니라 15200원이더군요. 기겁했지만 이미 돈을 내고 표를 산지라 무를 수도 없었습니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냥’ 고속버스로 갈 때는 10400원인데, 좀 더 빠른 특급 고속버스는 15200원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표를 주문할 때 그걸 생각하지 못하고 주문한 거죠). 버스 좌석에 앉으니 얼마 안 있어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결국 대전으로 갈 때까지 두 시간동안 죽은 듯이 잤습니다.
대전 복합터미널에 오니,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었어요. 주위를 둘러보며 식당이 어디 있는지를 찾아보고, 터미널 밖으로 나온 순간, ‘2층에 영풍문고가 있음’이라는 안내문이 눈에 띄더군요. 호기심이 생겨(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저도 책과 글이 있는 곳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합니다) 다시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찾았죠.
2층에 가 보니 정말 영풍문고(서점 이름)가 있더군요. 저는 그 안으로 들어가 ‘서울에 있는 다른 서점처럼 컴퓨터로 책 이름을 검색하면 책이 나오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서점 안을 열심히 둘러보았지만, 컴퓨터는 없고 오로지 책뿐이었습니다. 그 말인즉슨 제가 책을 찾으려면 책 이름만으로 직접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죠. 좀 귀찮았습니다.
원래는『공화주의』라는 책을 찾아서 서점 안으로 들어왔는데 어렵게 찾아낸 인문/사회 책꽂이에는 그 책이 없더군요. 실망해서 돌아서려는 순간, 우연히 책꽂이에 있던 한 책을 봤어요.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라는 책이었는데, 책 제목이 아니라 무심코 펼쳐보았을 때 눈에 맨 먼저 들어온 대목 때문에 주의깊게 읽게 되었습니다. 저자는『빨간 머리 앤』에 나오는 앤 셜리를 예로 들며 서구사회의 빨간 머리에 대한 편견을 소개했는데, 역사를 전공하고 독학까지 한 저도 잘 몰랐던 이야기라 관심이 생긴 거죠(사족을 달자면 저는 빨간 머리인 여성을 매력적이라고 여기지 이상하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책을 읽기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이 책을 살까?’라고 생각했지만, 제가 대전에 온 건 책 때문이 아니라 여행 때문이었고 제 여행 가방에는 이미 서울에서 가지고 온 책『내 이름은 욤비』가 있었기 때문에 잠시 망설였습니다. 결국 책을 내려놓고 다시 터미널 밖으로 나왔죠.
원래는 복합터미널에 있는(아니 있다고 믿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대전 엑스포 과학공원(이하 과학공원)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터미널을 아무리 둘러봐도 - 그리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가 보아도 - 버스 정류장은 찾을 수가 없고, 길을 메운 건 오로지 택시, 택시, 택시 뿐이더군요. 할 수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님께 과학공원에 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기사님께 “공원 입구에서 내려 주세요.”라고 부탁했더니, 기사님이 “입구요? 어떤 입구요? 입구가 하나가 아닌데!”라고 하시더군요. 순간, 난감했지만(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서 그랬습니다) 과학공원에 ‘한빛탑’이라는 크고 뾰족하고 송곳처럼 솟아오른 탑이 있다는 게 떠올라 “그러니까 한빛탑이 있는 곳이요!”라고 대답했어요. 그러자 기사님이 "아,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죠. 가면서 미터기를 몰래 훔쳐보는데 요금이 무려 5800원 이상 나오지 뭡니까?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과학공원에 다녀오겠다는 약속을 어길 순 없어서 튀어나오려는 한숨과 답답함을 꿀꺽 삼켜야 했죠.
마침내 공원 입구에 도착해서 내리니까, 한빛탑이 - 제가 어릴 적에 사진으로 보았던 그 한빛탑이 - 저를 환영하더군요. 물론 그 전에 입구에서 사람들이 포도주(저는 와인Wine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잔을 들고 포도주 냄새를 물씬 풍기면서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죠(그곳에 걸린 펼침막에 따르면, 과학공원에서 포도주 축제를 연다고 합디다). 제가 생각했던 공원의 분위기와는 좀 달랐기에 당황했지만, 어차피 저는 공원에 있는 시설들을 보려고 왔지 포도주를 마시려고 온 게 아니라서 축제 현장은 그냥 지나치기로 했죠. 단, 오리고기 꼬치를 판다는 걸 알고 그것 하나를 사 먹었고, 그것만 먹으면 입가심이 안 되니까 근처에서 아메리카노도 한 잔 사 마셨습니다(오리고기 꼬치가 하나에 5000원이더군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가 들른 과학공원의 시설들은 모두 무료였고(안내원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원래는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 지금이 축제기간이라 특별히 돈을 안 받는다고 하더군요. 제가 유리한 시기에 잘 찾아온 거죠), 시설물도 나쁜 수준은 아니라서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만, 지금 기억에 남아있는 건 ‘사람처럼 생겼으면서 사람보다 작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로봇들’(처음에는 아주 신기해하면서 보았는데, 중간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나와 기분을 망쳤습니다. 그래서 보다가 나왔죠), ‘한빛탑에 올라가 바라본 주변 경관’, 그리고 ‘대전 엑스포 마스코트인 꿈돌이’ 정도예요. 첨단과학이나 기술이나 이른바 ‘발전’/‘미래의 세계’에 대해 설명한 많은 물건과 시설을 보았지만, 그것이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죠. 오히려 ‘만약 어릴 적에 이곳에 와서 이것들을 봤다면, 나는 정말로 감동했고 이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았을 거야. 나는 이곳에 오지 말아야 했어. 괜히 왔어. 나와 이곳은 어울리지 않아.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늦게 왔다는 걸 깨달은 겁니다.
싸늘해진 가슴을 안고 시설 밖으로 나왔는데, 도중에 과학공원 안에 있는 건물 - 진흙으로 물건이나 동물을 만들고, 진흙을 가지고 노는 건물 - 에 들러 안을 들여다봤어요. 하지만 이미 제가 이곳에 괜히 왔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들어가 봤자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나왔죠.
공원 밖으로 나오니 - 들어올 때 본 입구와는 다른 입구로 나왔음 - 주위에 ‘과학연구단지’나 ‘기술연구소’가 있었어요. 과학공원과 짝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가까웠죠. 제 눈에 비친 대전은 ‘미래의 도시’, ‘과학의 도시’, ‘기술의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통 과학과 기술로 뒤덮인, 과거나 전통을 담은 곳이 아니라 오로지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도시, 그게 제가 받은 대전에 대한 인상이었어요.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택시를 잡고 다시 복합터미널로 돌아갔어요. 물론 택시비는 많이 나왔죠(여행비 가운데 대부분이 교통비로 빠져나갔습니다. 이것도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돌아와 보니 몸과 마음이 지쳐서 도저히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그래서 미리 조사한 대로 터미널 근처에 있는 모텔(서울에서 전화를 걸어 미리 예약해두었음)에 올라가 이름을 밝히고 열쇠를 받아 방 안으로 들어갔죠. 뱃속이 부글거리고 꽉 막힌 기분이라 저녁을 먹고 싶지 않았고, 어차피 교통비로 많은 돈을 써서 더 이상 돈을 쓰면 안 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어요. 그래서 터미널로 왔을 때 터미널 근처의 과일가게에서 산 감귤 한 봉지를 까 먹고, 집에서 가져온 홍차 티백을 방 안의 정수기에서 뽑은 뜨거운 물에 우려내 배를 채웠습니다. TV는 유선이라 볼 만한 게 없었고, 밖에는 나가고 싶지 않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어요. 그러다가 문득 가방 안에『내 이름은 욤비』가 있다는 게 떠올랐죠. 그래서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 위에서 그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어요. 그냥 시간 떼우기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그 책에 푹 빠져 있는 자신을 보았고 결국 책을 다 읽어버렸답니다. 읽고 나니 잠잘 시간이 되었더군요. 그래서 책을 덮고 다시 TV를 켜서 프로그램을 본 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뱃속을 붙들고 겨우 잠들었습니다.
잠자기 전에 제가 과학공원을 보면서 느낀 것을 생각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계속 이런 식으로 노닥거릴 수는 없어. 서울로 돌아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일자리를 찾자. 협동조합이건 사회적 기업이건 상관없이 취직하는 거야. 얼마 전에는 “네 아버지가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사람들에게 부탁하면 취직시켜 줄 수도 있는데, 네 성격이 개조되지 않아서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는데, 그렇다면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있어도 직장에 충실할 테니, 직장을 소개해 주세요.”라고 부탁해야겠어. 과학공원을 보고 나서 깨달았어. 나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여 있을 수가 없어. 과거의 느낌이나 막연한 그리움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면 안 돼. 앞으로 나가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 밥벌이는 제가 하겠다고 마음먹은 거예요.
또 이 여행을 하기 바로 전날 한국의 라이트노벨(Light Novel)인『나와 호랑이님』을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깎아내리는 글을 읽었는데, 그 글을 읽고 나니 갑자기(!) 없던 용기가 생겨 ‘그래? 그게 한국 라이트노벨의 수준이란 말이지? 그나마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작가의 작품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면 차라리 내가 (소설을) 한편 써? 내가 블로그에 소설을 연재할까?’라는 생각이 들지 뭡니까? (물론 팬 소설이 아니라 순수한 창작물로 쓰겠다는 것임) 그래서 모텔 방 안에서 - 물론 과거를 정리하고 취직하겠다고 마음먹은 뒤 - ‘소설가를 부업 삼을까?’라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어제 아침)에 일어나기는 했는데, 시계를 보니 여덟 시더군요. ‘에이, 조금만 더 자지 뭐.’라고 생각하면서 뒤척이고 있는데, ‘조금’이 무려 한 시간 반이 넘어가는 시간이 되어버렸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 잠들어 버릴 것 같아서 샤워하고 짐 챙기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모텔을 나왔습니다.
늦은 시간이라도 밥은 먹어야 하기에 터미널 주위를 살펴보았는데, 문득 어제 그냥 지나친 곳이 눈에 띄더군요. ‘아이리시 포테이토(에이레 식 감자라는 뜻)’라는 밥집(식당)이었어요. 어떤 곳이냐 하면, 감자 요리와 콜라와 커피만 파는 곳이었습니다. 네, 즉석식품(패스트푸드)을 파는 곳이었어요. 순간, 망설였지만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음식이기에 ‘도대체 어떤 맛일까?’라는 궁금증을 떨칠 수 없었어요. 결국 들어가서 ‘오메가 3’이라는 기름으로 튀긴 감자칩과, 고추 양념을 뿌린 감자튀김(프랜치 프라이)과,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죠. 먹으면서 ‘이게 아닌데. 열량이 너무 많은데, 너무 기름진데 … .’라고 생각했어요. 후회했죠. 자신에게 마음속으로 ‘너는 네 호기심 때문에 결국 너를 망칠 거야. 호기심 때문에 안 하는 짓이 없잖아?’라고 말을 걸었어요. 그래도 설탕이 들어간 단 음식이나 고기 튀김은 안 시켰다고 생각하면서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어요. 어차피 박물관까지 가려면 배를 채워야 하니까, 다른 건 따지지 말자고 다짐했죠.
화폐박물관까지 갈 때에도 택시를 타야 했는데, 택시비가 장난 아니게 많이 나오더군요. 무려 7000원 이상이 나왔으니까요(흑흑흑!). 게다가 택시를 탔는데도 30분 이상 걸리는 게, 만약 버스를 타거나 걸어가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지 알 수가 없었어요. 한참을 가던 택시는 박물관에 도착한 뒤 저를 내리고 돌아갔습니다. 어차피 화폐박물관은 다른 박물관과는 달리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보고 오라.’고 성화를 부린 부모님 때문에 온 거니까, 기대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들어갔어요.
그런데 들어가서 보니까 그게 아니더군요. 박물관의 설명문을 보니 중앙아메리카와 필리핀에서는 곡물이 돈이었고, 고대 중국에서는 농기구(의 날)이 돈으로 쓰였고, 고대 영국(아마 켈트족이 있던 시절의 영국이겠죠?)에서는 검이나 창 같은 무기(!)가 돈이었고,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털가죽(모피)을 돈으로 썼고, 동아시아에서는 말린 인삼이 돈으로 쓰인 적도 있었어요. 조개껍질은 4100년 전부터 중국에서 돈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중국 내륙에서는 생선이 귀해 건어물이나 청동으로 만든 건어물 모양의 돈/흙으로 건어물 모양을 빚은 뒤 불에 구워 만든 돈이 화폐로 쓰였고요.
농기구 모양을 본떠 만든 포전(布錢)이라는 고대 중국의 돈은 저에게 3년 전 서울역사박물관 지하 창고에서 본 포전들을 떠오르게 해 주었고, 조선시대에 편찬된『동국사략』과『해동역사』에는 서기전 957년(지금으로부터 2970년 전) “기자조선 흥평왕 때” 우리나라 최초의 돈인 ‘자모전(子母錢)’이 쓰였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사실은 (역사를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흥미를 끌었습니다.
구리를 녹여 만든 가지쇠에 돈들이 매달려 있는데, 이것이 나뭇잎(엽葉)들이 매달린 나무 같다고 해서, 거기서 떼어낸 돈을 ‘잎사귀 돈’이라는 뜻인 ‘엽전(葉錢)’으로 부른다는 설명문을 읽을 때는 ‘아! 그래서 옛날 동전을 엽전이라고 불렀구나!’라고 생각하며 뭔가 중요한 것을 알았다고 자부하기도 했죠.
박물관에서는 돈의 폐해를 비꼰 고려시대의 소설인『공방전』을 전시했고, 설명문에 돈을 다룬 한국/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조선 공화국)의 속담들을 실었는데, 그 속담들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게 “사람이 돈을 이겨야지, 돈이 사람을 이겨서는 안 된다.”였어요.
고대 영국의 켈트인이 무기를 돈으로 썼다는 말을 듣고 의아해했는데(하지만 켈트인은 헬라스 사람이나 로마인처럼 금은으로 동전도 만들어 썼습니다), 고대도 아니고 근세인 서기 1467년, 조선 세조 13년에 조선 조정이 만든 전폐라는 돈은 평소에는 돈으로 쓰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화살촉으로 쓰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추정된다는 설명문을 듣고는 ‘우리도 똑같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제로 전폐는 화살촉처럼 생겼으니까요.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안보물선에 대해 설명하는 글에는 더 재미있는 것이 있었는데, 원나라 때 가라앉은 배임에도 불구하고 배에서 나온 동전 가운데에는 서기 14년(중국 신나라 때)에 만든 ‘화천(貨泉)’이나 당나라 때에 만든 돈인 ‘개원통보’가 원나라 때의 동전인 ‘지대통보’와 함께 나오지 뭡니까?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동옥저나 신라 때 만든 동전이 조선 말기에 조선 동전과 함께 쓰인 것과 같은데 오늘날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라 흥미로웠다는 말이죠.
박물관 2층에는 지폐를 설명하는 글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자료를 얻었습니다. 조선에 ‘저화(楮貨)’라는 지폐(!)가 있었다는 것, 그것도 조선의 기록에 그 사실이 나오고 저화의 구체적인 가치까지 적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중국에서 세계 최초의 지폐가 나왔고 중국을 정복한 몽골이 그것을 대량으로 찍어냈다는 것은 알았지만, 몽골을 몰아낸 명나라가 계속 지폐를 찍어냈다거나, 조선이 그걸 본받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동전이나 곡식이나 무명이나 삼베나 소금만 돈으로 쓰인 줄 알았음).
원래 고려 말인 서기 1391년에 조정이 지폐를 찍어내려고 했지만, 신진사대부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하다가, 새 왕조인 조선이 들어선 지 10년이 흐른 서기 1402년에 저화를 찍어내기 시작했답니다. 초기의 저화는 원나라(몽골)나 명나라(중국)의 지폐보다 더 커서 쓰기 불편했고, 서기 1474년 - 그러니까 저화를 찍어내기 시작한 지 72년 - 에야 명나라 지폐처럼 작게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저화의 교환 가치는 원칙적으로 저화 1장에 쌀 2말, 저화 30장에 면포 1필로 정했으나, 씨알(백성)들은 실제 먹지도(곡식은 돈으로 쓰이지만, 먹을 수 있음) 입지도(무명도 돈으로 쓰이지만,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음) 못하고 교환 가치밖에 없는 ‘종이쪽지’인 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쓰지도 않아 그 값어치가 떨어졌답니다. 이러한 문제로 일정 기간 저화의 유통이 정지되기도 하였지만 성종 때까지 쓰이다가, 중종 때부터는 - 그러니까 조선 중기부터는 -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는데, 아직까지 실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답니다(아마 불타거나 썩어버렸을 겁니다).
유럽의 지폐 사용도 그 역사가 400년밖에 안 되는데, 영국에서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여행자가 돈을 도둑이나 강도에게 빼앗기는 걸 막기 위해 금융업무를 수행하던 금장(金匠)에게 돈을 맡기고, 그에게서 예치증서를 받은 뒤 목적지에 다다르면 그 증서를 목적지의 금장에게 가서 보여주고 동전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 증서가 서양 지폐의 기원이라네요. 오늘날 세계 여러나라에서 쓰는 지폐는 이런 서양 지폐를 본받은 거고요.
중국의 지폐도 원래는 상인들이 쓰기 시작한 일종의 약속어음이었지만 곧 남송(南宋) 정부가 국가의 화폐로 쓰기 시작했고, 남송을 무너뜨린 원나라(몽골)는 정부가 나라의 금/은을 모두 강제로 거두어들여 보관한 뒤, 그 대신 지폐를 발행하여 금/은의 가치를 보증하는 수단으로 썼다고 합니다. 이것을 명나라 대까지 이어서 하다가 그 뒤로는 지폐 사용이 사라진 거죠. (중국과 영국의 지폐가) 같은 지폐인데도 쓰임새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화폐박물관에는 훈장이나, 메달이나, 우표나, 다른 나라의 돈들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다른 나라의 돈들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왜 훈장/메달/우표가 ‘돈’을 다루는 박물관에 있어야 하는 건지 그걸 이해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냥 전시할 게 모자라서 그런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 와중에 건질 게 있어서 그것들(돈 말고 다른 전시물들)을 보았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건 조선노동당이 만든 조선 공화국의 우표였어요. 조선노동당은 서기 1949년 정식으로 조선 공화국을 세우기 전까지는 “무궁화”와 “태극기”가 들어있는 우표를 인쇄했고(서기 1946년 3월. 지금은 모란꽃과 인공기를 내세움), 서기 1955년 5월에는 “이순신 장군”이 들어있는 우표도 인쇄했더군요(하긴 그들은 안중근의병장이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죽인 사실을 담은 영화도 만들었으니까요). 그걸 보면서 지금은 험악한 남북관계가 그래도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고, 한국과 조선 공화국이 마치 가는 실에 묶인 두 기둥처럼 조금이라도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그 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조선 공화국의 우표 가운데 서기 1980년 이후에 만든 것으로 “램브란트(화가)”, “피카소(화가)”. “뉴턴(과학자)”이 들어간 것이 있다는 설명문을 보자, ‘만약 조선 인민이나 조선인 망명자를 만나 세계 여러나라의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조금만 조심하면 말이 통할지도 모르겠네. 이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유명한 외국인을 기리잖아?’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뭐 그들이 정치인이 아니라 예술가와 과학자라서, ‘미국인이 아니라서’ 실린 것이겠지만요. 이건 화폐박물관에 들어올 때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득이었습니다(아니,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화폐박물관의 모든 설명문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득이었죠!).
이 박물관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몰라서, 용돈기입장에 볼펜으로 박물관의 설명문을 꼼꼼하게 옮겨 적은 뒤 박물관 밖으로 나왔어요. 문제는 주위에 버스 정류장이 없고 택시가 서는 곳도 없어서, 계속 걷고 걷고 또 걸어야 했다는 거죠. 순간, 당황했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어요. 택시를 탈 때 창 밖으로 보았던 길을 기억을 되살려서 거슬러올라갔고, 주위에 ‘과학 단지’나 ‘연구 단지’라는 말이 나오는 건물들이 나올 때까지 계속 걸었고(걸으면서 ‘역시 대전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의 도시, 미래의 도시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몸에서 땀이 나와 윗도리가 흠뻑 젖을 때까지 걸었습니다. 한 때는 버스정류장이 나오길래 ‘버스 타고 갈까?’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렸지만 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왔고, 게다가 제가 대전 지리를 잘 모르고 있으니 버스를 타면 복합터미널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라 버스 타는 걸 포기하고 다시 걸어야 했어요. 그러다가 탁 트인 잔디밭과 카페와 건물들이 나온 걸 보고 표지판을 자세히 보니 ‘기숙사’, ‘교수 아파트’라는 말이 적혀 있더군요. 순간, ‘잠깐, 여기가 대학이라고? 그렇다면 대학 정문을 찾으면 될 거야. 그리고 대학 정문 주변에 있는 건물들을 찾으면 거기서 택시를 잡으면 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운을 되찾고 다시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대학 정문과 가까운 곳까지 온 순간, 하늘이 저를 버리지 않으셨는지 택시 몇 대가 지나가는 모습이 눈에 띄더군요. 앞뒤 가리지 않고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처음 본 택시는 저를 그냥 지나쳐 갔죠. 두 번째로 본 택시가 멈춰 서더니 저를 태워주더군요. 물론 저는 그 택시를 타고 복합터미널로 갔고 택시비는 9500원이나 나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터미널에서 표를 사서 서울로 가야 했기 때문에,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어요. 일단 터미널에 가서 표를 한 장 샀는데, 이번에는 일반 고속버스의 표를 샀기 때문에 10400원만 낼 수 있었죠.
오후 세 시에 떠나는 고속버스를 예약한지라 시간이 남아돌아서 어떻게 할까 망설였는데,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게 생각나 터미널 근처 식당에서 비빔국수를 한 그릇 사먹었고, 그래도 시간이 남자 영풍문고에 가서 노닥거리다가 오기로 하고 다시 영풍문고로 갔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문제의 책인『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를 집어들었죠. 이번에는 빨간 머리를 다룬 내용 뿐만 아니라 다른 글들도 읽었는데, 글을 읽고도 책을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어요. 그러는 동안에 시간은 자꾸 흘러서 드디어 2시 50분이 되었죠. 결국 사기로 마음먹고 여행비에서 돈을 내고 책을 샀는데, 아슬아슬하게 시간이 겹쳐 터미널에 돌아오니 딱 2시 58분이더군요. 동서울 터미널로 가는 고속버스라는 걸 확인한 뒤 버스에 탔죠.
버스를 타고 오면서, 이번에는 방금 전에 산 책을 공들여가며 읽었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가더군요. 고속버스에 타면 졸리기 마련인데 전혀 졸지 않고 책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서양의 옛날 이야기로 읽는 서양의 역사를 다룬 책인데 사학을 전공한 저도 전혀 몰랐던 사실들이 줄줄 나와서 사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것도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소득이기 때문에 아주 기뻤습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내린 뒤, ‘이번에는 꼭 버스를 타야지.’라고 생각하며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안 왔어요. 이대로 밤을 샐 순 없기에 한숨을 푹푹 쉬어가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1박 2일 동안의 대전 여행은 막을 내렸죠.
물론 좋은 경험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대전의 지리와 교통편을 몰라서 택시를 타야 했고, 그래서 여행비 가운데 교통비가 차지한 비율이 높았죠. 감자튀김을 잔뜩 먹어치우고 한 끼를 때운 건 더 부끄러운 기억이고요. 또 위장에 탈이 났는지 소화가 잘 안 되고 뱃속이 부글거리는 건 서울에 도착해서도 나아지지 않아서 어제 새벽 네 시까지 잠을 설쳤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도 화장실을 잘 가지 못하고 있어요. 벌써 사흘째인데 언제까지 이럴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여행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말씀드려야겠다고 여겨(약속했으니까요) 이렇게 사정을 털어놓습니다. 부디 궁금증이 풀리셨기를 빕니다.
(덧붙이는 글 : 제가 어느 정도는 기대를 품고 간 과학공원에서는 실망하고,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화폐박물관에서는 많은 것을 배우고 올 수 있었다는 게 정말 역설적이지요. 삶은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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