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드레 전(지난해 12월 24일), ‘스키타이 황금문명전’이라는 전시회를 보고 왔습니다. 그동안 보겠다고 벼르기만 했지 뜻을 이루지 못해서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기회가 와서 보게 된 거죠.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전시실에 들어가서 유물들을 봤는데, 정말이지 너무 아름답더군요. 금으로 만든 유물, 은으로 만든 유물, 청동으로 만든 유물, 보석으로 만든 유물, 쇠로 만든 유물까지 없는 게 없었답니다.
우크라이나라는 나라에서 나온 유물들을 전시한 건데, 스키타이족의 유물만 있는 게 아니라 킴메르인, 사르마티아인, 헬라스(영어 이름 ‘그리스’)인, 훈족, 하자르족, 아바르족, 플로베츠(킵차크)족, 키예프루스인, 몽골인, 신라인, 근대 우크라이나 인의 유물도 있었어요. 그것들이 한결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워서 할 말을 잃었죠.
유물들이 민족에 따라 조금씩 다르던데, 스키타이족의 것은 금이면 금, 은이면 은, 쇠면 쇠 하는 식으로 한 가지 재료로만 만들었고 그 안에 나타나는 사람과 동물이 아주 사실적이었어요.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고 아주 자세하고 구체적이었죠. 사르마티아인의 것은 금 안에 보석을 박아 넣거나, 추상적인 무늬를 많이 집어넣거나, 모양을 단순하게 만들었고요. 근대 우크라이나인의 것은 금으로 만들고 나서 은을 곁들이거나, 금/은으로 만들고 나서 복잡한 무늬와 그림을 많이 새긴 것이었어요. 같은 나라에서 나온 유물이라고 해서 다 같은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답니다(고대나 중세의 유물은 아주 아름답고 눈길을 끌었는데, 근대의 유물은 똑같이 금/은으로 만들고 복잡한 무늬가 새겨져 있어도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더군요. ‘정성을 들였다.’는 건 알겠는데, ‘아름답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거였어요. 그냥 ‘쓸데없이 복잡하고 화려하다.’는 느낌이 들었답니다).
그런데 킴메르인(아니 스키타이인이던가요?)을 설명하는 글에 “그들은 (우크라이나의) 동쪽에서 왔다.”는 대목이 나오더라고요. 그걸 읽은 순간, 제 머릿속에서는 김혜린 선생님의『불의 검』이 떠오르고, 카르마키가 떠오르는 것이었죠. 아무르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초원의 서쪽으로 사라진 카르마키족의 열 유르스와, ‘전사의 길을 되찾기 위해’ 전쟁이 끝나기 전 서쪽으로 간 우르판 유르스가 생각났어요. 그들이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를 거쳐 우크라이나로 가 새로운 나라를 세운 건 아닐까. … 라는 상상이 머릿속에서 날개를 달고 날아다녔죠. 김혜린 선생님이 이런 것까지 다 계산해서 작품을 만드신 것이라고 생각하니 존경스러웠고,『불의 검』이 결코 만만한 작품이 아니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답니다.
좀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도 있어요. 우크라이나에 있던 헬라스 식민지가 쓰던 동전이 제 눈길을 끌었는데, 제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동전들이 크지 않았어요. 지름이 한 1~2cm밖에 안 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고(금화건 은화건 구리동전이건 마찬가지였음), 어쩌다 큰 게 나오더라도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더 큰 거였고, 그나마 그건 구리로 만든 거더라고요. 색깔도 칙칙했고요. ‘이렇게 작은 것들을 어떻게 돈으로 썼지?’라는 의문이 들었더랍니다. 도대체 그 동전들에 나오는 무늬와 그림을 어떻게 새겨 넣었는지도 궁금했고요(10원짜리 동전보다도 작은 동전에 손이랑 도구로 무늬를 새겨 넣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정말 옛날 장인(匠人)들은 대단합니다(그런데 막상 그것과 함께 나온 헬라스 도자기들은 별로 안 끌리더라고요. 전 스키타이족의 유물을 보러 왔지, 헬라스의 유물을 보러 온 건 아니었으니까요. ‘기대를 안 했으니, 얻은 것도 없다.’고나 할까요?).
좀 뜻밖이라고 여긴 건 또 있었는데, 황금/은/보석뿐만 아니라 ‘초라한 보통 유물’도 함께 전시했다는 거였죠. 전시회에서는 검고 윤기나며 단순한 무늬가 새겨졌고 손잡이가 달린, 스키타이 흙그릇이 세 개 전시되어 있었고(2600년 전의 것임), 검고 단순하게 생겼으며 역시 손잡이가 달린 동(구리)으로 만든 솥도 두 개 전시되어 있었거든요. 어찌 보면 전시회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인데도 저는 그 물건들이 좋았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유물들이 스키타이 족도 먹고, 마시고,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는 걸 가르쳐 주었거든요. 화려한 유물들로 둘러싸여 숨이 턱턱 막혔던 전시회에 ‘숨통’을 터 주었던 거죠(이것들을 전시해 준 전시회의 책임자들에게 고마워하고 있답니다).
전시장에는 흑해(우크라이나 남쪽, 터키의 북쪽에 있는 바다) 연안에 살던 게르만족인 ‘고트’족의 유물도 있었는데요, 제가 그걸 보고 있자니, 세 여자분이 제 곁으로 다가오시더라고요. 그 중 한 분은 30~40대로 보였는데 휠체어를 타고 있었죠. 휠체어를 밀던 다른 여자분(50대로 보였습니다)이 손가락으로 유물을 가리키며 “얘, 저것 봐. (황금으로 만든 건데) 참 아름답지 않니?”라고 하셨어요. 휠체어에 탄 여자분은 고개를 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유물을 봤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실례해요. 잠깐만요.”라고 말한 뒤 그분들 앞을 지나 다른 유물을 보러 갔죠. 저는 그분들이 관람을 잘 하시길 빌면서 빠져나왔답니다. 장애인으로서 문화생활(전시회 관람)을 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좀 뜻밖이었어요. 그분(휠체어를 탄 여자분)이 아무 말씀도 안 하셔서, 과연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분 말고 다른 장애인들도 와서 전시회를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 전시회가 서울에서, 그것도 ‘예술의 전당’에 속한 ‘한가람미술관’에서만 열리고(사실, 이건 불공평합니다. 다른 도시도 전시회를 열 수 있어야죠! 왜 서울이 아닌 도시들에게는 기회가 돌아가지 않는 걸까요? 앞으로 이런 점을 고쳤으면 좋겠어요), 입장료도 한 사람당 1만 2000원(!)이라는 점이 문제이기는 합니다만(네, 꽤 비싸죠), 그래도 다음해 2월 26일까지는 계속되니 관심 있는 분은 한번 와서 보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다큐멘터리도 틀어주고, 스키타이 여성들의 옷도 재현해서 전시하고 있어요).
*사족 1 : 전시회 입구에서 ‘최초의 유목민’인 킴메르인의 이야기가 담긴 유물과 설명문을 보았을 때, 저는 ‘최초의 유목민’하면 먼저 ‘스키타이’부터 떠올리던 자신의 무지함을 깨달았고 스키타이 이전에도 유목민족이 살았음을 알고 호기심을 품었습니다. 그들의 추상적인 무늬가 베풀어진 비녀와 비비꼬인 형태로 만든 작은 금목걸이가 유물의 전부였던 것은 아쉬웠죠. 좀 더 많은 유물과 유적이 있다면 그들의 삶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을 텐데 …. 앞으로 더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뿐입니다(스키타이족과는 달리 킴메르인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어서 그들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사족 2 : 스키타이족의 금목걸이에 붙은 금으로 만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어떨까요? 저는 20년 전 그 모습을『세계의 마지막 불가사의』에서 사진으로 보았을 때에는 별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냥 그 책의 설명문대로 “(앉아서 양젖을 짜는)이 모습은 20세기 후반 유라시아의 유목민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이해하고, ‘아, 그냥 일상적인 모습을 새긴 거구나.’라고 판단했을 뿐이죠. 그런데 이번 전시회에서 그 모습을 사진으로 한번 더 보고, “이 사람은 눈 먼 노예였을 가능성이 크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스키타이의 귀족들은 짐승의 젖을 짜는 사람이 좋은 젖인지 아닌지를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 일을 맡은 노예들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한다.”는 설명문을 읽은 뒤에는 그 유물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답니다. 안 그래도 스키타이족을 ‘잔인한 족속’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그런 사연까지 알게 됐으니, 기존의 선입견이 더 새롭게 무장한 셈이라고나 할까요. 과거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되새겨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사족 3 : 전시회에 붙은 설명문에도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습니다. 신라와 초원지대의 황금 유물과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신라의 북방계 유물은 주민이 이동하거나 기마민족의 정복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신라가 능동적으로 북방계 유물을 흡수하는 서기 4~5세기의 동아시아의 전반적인 정세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구절이 나왔는데, 다른 건 몰라도 무덤 양식이 같고 지배층의 유물도 비슷하다면 “주민이 이동하거나 기마민족의 정복”이라는 걸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신라인이 직접 남긴 금석문인 문무왕릉 비문이나 신라 귀족의 묘비명에는 김金씨가 흉노족인 김일제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걸 밝히고 있는데 그렇다면 흉노의 유민들이 오랫동안 다른 유목민의 신하로 살다가 서기 4세기 후반에 고구려를 뚫고 경상북도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유목민족의 무덤과 유물이 나온다고 - 그리고 기록은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 봐야 하겠죠. 이 전시회를 기획한 사람들이 아직 자기 역사와 관련된 진실을 제대로 이야기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사족 4 : 불만인 점은 또 있습니다. 전시회는 훈족에 대해 설명할 때 훈족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세케이’족이 루마니아에 산다는 사실과, 헝가리의 주류 민족인 ‘마자르’족이 훈족과의 관련성을 주장한다는 사실은 다루지 않았으며, 하자르족이 이슬람 제국이나 동로마 제국과 싸우면서 유태교를 받아들였고 관용적인 정책을 펼쳐 다양하고 복잡한 문화들이 공존했다는 사실이나 하자르 제국이 망한 뒤 많은 하자르족이 러시아와 중부 유럽으로 흘러들어가서 유태인이 되었다는 것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또 스키타이족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는 ‘오세트’인이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러시아의 카프카스 산맥과 그루지야(조지아)에 살고 있다는 사실, 스키타이족의 문화가 오세트인에게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죠. 이런 ‘알맹이가 빠진 설명’이 과연 무슨 도움이 될 것인지 회의를 품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