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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그냥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부터 털어놔야겠습니다. 저는 지난 달 28일, 광화문 역(지하철)에 내려서 8번 출구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출구 바로 옆에 세로로 된 휘장이 걸려 있더군요. 그 휘장에는 이런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 “나에게 왕관과 망토를 주시오. 왕으로 만들어 드리리다!”
- 한국에서 공연되는 최초의 아랍 현대 연극!
- <왕은 왕이다>
- 9월 3일부터 세종문화회관의 M씨어터에서 공연합니다!
순간, 호기심을 품었고 - 중학생이던 때부터 아랍 세계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 ‘어떤 연극인지 내 눈으로 직접 봐야지!’라고 마음먹었죠.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9월 3일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9월 3일이 아니라 그 다음날에야 연극을 볼 수 있었어요. 물론 그 날이 오기 전까지 그냥 앉아 있었던 게 아니라 광화문 역에 가서 역 입구 안에 있는 연극 공연 안내문을 베꼈고(공연기간, 공연시간, 공연하는 날, 관람료를 알아야 하니까요), ‘네이버’에서 ‘왕은 왕이다’라는 말로 검색을 했지요. 그랬더니 더 재미있는 사실이 나오지 뭡니까?
<왕은 왕이다>는 34년 전인 서기 1977년에 시리아(아랍국가 가운데 하나.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사이에 끼어있는 나라임) 사람인 ‘사아달라 완누스’라는 사람이 쓴 극본을 바탕으로 공연한 연극이고, 그 유명한 아랍 고전인『아라비안 나이트』(한자로는 ‘1001 밤 동안의 이야기’라는 뜻인 ‘천일야화千一夜話’라고 씀. 아랍어 원제[原題 : 원래 제목]도 이런 뜻임)의 이야기(‘아부 하산 이야기’)를 빌려와서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었으며, 권력과 현실을 풍자하는 내용이라는 거였어요. 이런 사실들을 알고 나니 ‘이걸 놓치면 평생 후회할거야!’라는 확신이 들었죠.
드디어 운명의 날 - 그러니까 9월 4일 - , 저는 표를 예매하고(사실 원래는 극장 앞에 가서 표를 살 생각이었습니다. 예매하는 게 귀찮았거든요. 익숙하지도 않았고. 영화를 볼 때에도 마찬가지라서, 아직까지 영화관에서 직접 표를 사는 걸 고집해요) 오후 1시 10분에 집을 나섰죠. 집이 서울 송파구에 있는지라 광화문 주변에 있는 세종문화회관(그리고 세종문화회관에 있는 M 씨어터)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했습니다(오후 3시의 공연을 보려고 했거든요).
예매했다는 증거인 예매 확인 메일(인쇄물)을 들고 2시 반에 M 씨어터로 가보니, “지금 들어가서 기다리시면 돼요.”라고 하더군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지정석으로 갔습니다. 그로부터 30분 뒤에 연극이 시작되었죠.
처음에는 흰 옷 입은 배우들이 한꺼번에 나와서 비누방울을 불고, 빙빙 돌면서 춤을 추길래 ‘어,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알고 보니 나오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간단한 절차일 뿐이었고, 본편이 시작된 뒤에는 사람들이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나오더군요. 그래서 마음 놓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따분하다고 투덜거리는 왕(王)이 나오는데, 그 왕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나라 안의 백성들이 자기를 위해 “황금으로 만든 왕의 큰 동상(재상의 말)”과 “화려한 비단들”을 바치는 일을 ‘과인이 당연히 요구해야 하는 일’로 여기고, “내가 그 정도도 요구할 자격이 없느냐?”고 재상에게 되물을 정도로 뻔뻔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재상이 “전하께선 이 나라를 세우신 분보다, 그리고 그 뒤에 나라를 다스리신 분들보다도 뛰어나십니다. 하늘에서 빛나는 태양과도 같으십니다.”라고 아첨하며, “그런데 전하께서 잠시 시간을 내서 보셔야 할 중요한 문서들이 있사옵니다.”라고 덧붙인 뒤 공문서를 바치면 “됐으니까 물러가시오. 재미없는 얘기들만 썼겠지.”라고 말하기까지 하지요. 재상이 대신(大臣)이 잔치를 열기 때문에 왕이 참석해야 한다고 아뢰면 “됐소, 됐어. 대신과 학자들이 모이는 잔치라면 뻔하지. 또 정치 얘기나 할 테고.”라고 말합니다(왕이 맞습니까?). 그 정도면 말을 안 하게요? 그는 평민이나 보통 부자로 변장하고 백성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그들의 말과 생활을 엿듣는 버릇이 있는데, 이게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려고 그러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사실은 - 재상이 걱정하는 대로 - “백성들의 불평불만과 분노와 그 사이에서 감도는 험악한 공기, 왕실에 대한 반발과 욕”을 엿듣고 ‘짜릿한 위험’을 즐기기 위해서 그러는 거라네요. 정말이지 답이 안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를 모시는 재상은 어떠냐? 그는 자신의 관복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변장하려고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도 죽으러 가는 것처럼 싫어합니다. 뭐 관복을 벗으면 자기 힘이 다 사라지는 것 같다나요. 왕에게 아뢰는 게 백성을 사랑해서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백성들이 불평불만에 가득 차서 거친 말을 퍼붓는 걸 뻔히 알면서도 “천박한 것들의 냄새” 때문에 죽을 맛이라며 그들을 비난하기만 하지, ‘왜’ 그들이 불만에 가득 차 있는지를 진지하게 따지지 않지요.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이 맞네요. 그래도 왕보다는 낮은 신분이니까 어쩔 수 없이 왕의 명령을 따릅니다.
(사실, 다 이야기하면 재미없으니까 안 보신 분들을 위해서 이제부터는 줄거리의 뼈대만 소개하려고 합니다)
왕과 재상이 다스리는 나라에는 ‘자히드’와 ‘우바이드’라는 두 젊은이가 살고 있는데, 이들은 나라가 잘못 다스려지고 있다고 여겨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찰청장이 철권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있고 종교 지도자와 탐욕스러운 상인들이 사람들의 삶을 휘어잡고 있어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죠. 그래서 우바이드는 옷 속에 베개를 집어넣어 곱사등이로 변장한 뒤 걸인 흉내를 내고, 자히드는 낮에는 그와 따로 떨어져서 다니다가 밤이 된 뒤에야 그를 만나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의논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잘못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언젠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그 때를 기다려서 들고 일어나야 한다. 너무 빨라도, 너무 늦어도 안 된다. 딱 그 때에 실행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지만 그 왕이 물러난 뒤에도 상황이 안 좋으면 어쩐다?’라고 걱정하지요. 우바이드는 구걸하다가(물론 연기입니다) 부자에게 얻어맞고, 그에게 “이것들이 나중에는 칼을 들고 덤비겠구먼?”이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들어요. 자히드는 경찰청장과 그의 부하들을 피해 서둘러 달아납니다.
우바이드는 ‘아부 잇자(아랍어로 “잇자의 아버지”라는 뜻. 아랍어로 “아부”는 “~의 아버지”라는 뜻이고, 한국인들이 상대방을 “아무개 엄마”, “아무개 아빠”로 부르듯이 아랍 사회에서는 사람의 이름 대신 “아부 아무개”라는 식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라는 상인의 집에 머무르고 있는데, 아부 잇자의 딸인 ‘잇자’는 그에게 호감을 품고 있고, 그가 변장을 했을 뿐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밀을 지켜주죠). 어느 날 잇자는 우바이드에게 “나는 언젠가는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나를, 그리고 사람들을 구해 줄 사람이 올 거라고 믿고 있어요. 혹시 당신이 그 사람인가요?”라고 묻죠. 우바이드는 “네/아니오”라고 말하지 않고, 대신 ‘변장의 역사’를 들려줍니다. 그걸 그대로 인용할게요(기억에 의존해서 적는 것이니,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 우바이드 : 그건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예요. 태초에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보석처럼 빛이 났지요. 땅은 사람들이 모두 골고루 나눠 가지고 있었고, 사랑과 우애가 넘쳤어요.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들이 나타났죠.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했고 땅에 울타리를 쳐서 자기 땅을 넓히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나중에는 그들이 왕으로 ‘변장’을 했죠. 그 뒤부터 사람들은 변장하기 시작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가난뱅이로 변장하고 가면을 썼고, 어떤 사람들은 백성이라는 가면을 썼고, 어떤 사람들은 귀족이라는 가면을 썼어요.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 빛을 볼 수 없었죠. 그래서 내가 곱사등이로 변장하고 이 ‘놀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어느 날 사람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함께 모여 왕을 죽였다고 해요. 그 뒤 그들은 왕을 먹어치웠죠. 처음에는 배가 아팠지만, 나중에는 괜찮아졌대요. 이건 역사책에 나오는 말이예요.
결국 우바이드가 바라는 세상은 왕과 귀족이 없는 세상이고, 사람들이 가난과 억압에 시달리지 않아 얼굴에서 보석처럼 빛이 나는 세상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과, “내 즉위 기념식에 황금으로 만든 내 동상을 바치란 말이야!”라고 요구하고 그걸 ‘당연한 일’로 여기는 왕이 한 나라에서 같이 살 수는 없는 일이죠. 어찌 보면 우바이드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나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기 좋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 일은 나 혼자만으로는 이룰 수 없고, 당신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실천해야 하는 일이죠. 생각해 봐요. 여러분은 원래 자유로웠어요. 단지 그 자유를 오랫동안 빼앗겼을 뿐이죠.”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니까 ‘구원자나 영웅을 기다리지 말고 여러분이 뭉쳐서 싸워야 한다.’는 주장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죠. 문제는 우바이드 같은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늘 쫓겨다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이 왕의 장난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뒤집힙니다. 왕은 ‘재미있는 놀이’를 하겠다며 변장을 하고 아부 잇자의 집에 오죠. 아부 잇자는 한 때 잘 나가는 상인이었으나, 사기꾼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다른 상인들의 텃세에 시달려 가게를 잃은 뒤에는 자기가 왕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남은 건 집뿐이죠. 왕은 그의 집에 와서 좋은 술과 먹을 것을 대접하겠다고 말한 뒤 그를 데려갑니다. 그리고 술에 약을 잔뜩 타서 그에게 권하죠. 아부 잇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술을 들이킨 뒤 깊은 잠에 빠집니다.
‘진짜’ 왕의 계획은 아부 잇자에게 왕관을 씌우고 곤룡포를 입힌 뒤 그를 단 하루 동안 ‘가짜 왕’으로 내세워서 왕궁과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뒤 다시 나타나서 가짜 왕이 혼란을 일으킨 것을 모두 정리하고 사람들에게 “봤지? 나 아니면 안 된단 말이야. 이제 누가 진짜 권위가 있는 왕인지 알았을 거야.”라고 말하려고 했죠. ‘짜릿하고 아슬아슬하고 재미있는 놀이’를 하려고 든 셈인데요. 이 일이 시작부터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아부 잇자는 잠에서 깨어나 어리둥절하지만, 곧 위엄 있는 왕의 모습을 보이며 주위 사람들을 휘어잡기 시작했거든요. 경찰총장을 부르더니 “의심이 없는 왕좌는 왕좌가 아니다. 너는 불온한 것들이 이 나라를 휘젓고 다니게 내버려둘 셈이냐?”라고 꾸짖고, 자기가 상인이던 시절에 자신을 괴롭혔던 종교 지도자와 상인을 벌주자는 의견을 듣고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 사람들이 왜 내 원수란 말이냐? 종교 지도자가 나에게 반대하라는 설교를 했느냐? 아니지 않느냐? 상인들은 많은 돈을 벌어 내게 바치는 나라의 기둥인데 내가 그런 자를 왜 벌주란 말이냐?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고 말하는가 하면, 망나니를 부른 뒤 망나니가 휘두르는 도끼가 마음에 든다며 “난 이 도끼와 한 몸인 것 같아. 앞으로 너(망나니)는 내 곁에 바짝 붙어 있거라. 그래야 과인이 도끼를 만질 수 있지.”라고 말하기까지 하지요.
더 기가 막힌 것은 아무도 변장한 진짜 왕과 재상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오랜 세월동안 왕의 발과 어깨를 주무르면서 모셔온 환관 ‘마이문’은 왕과 재상이 자신들의 옷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세요?”라고 물어보고(나중에는 진짜 왕에게 “참나. 나중에는 자기가 왕이라고 하겠네!”라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합니다), 재상 대신 아부 잇자를 모시는 ‘가짜 재상’ 우르꿉(아부 잇자의 하인)은 아부 잇자 앞에서 그들을 ‘왕을 즐겁게 해 주려고 최근에 온 광대’라고 소개하는가 하면, 경찰청장과 종교 지도자와 상인들은 가짜 왕 아부 잇자에게 굽실대며 감탄해요. (심지어 종교 지도자와 상인은 “왕이 더 왕 다워졌다. 좋은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진짜 재상까지 ‘내가 바라던 왕은 저렇게 박력 있고 나랏일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었어.’라고 생각하며 진짜 왕을 배신합니다. 진짜 왕은 ‘그래도 오랫동안 같이 살아온 왕비는 나를 알아보겠지.’라고 생각하며 마지막 기대를 걸지만, 왕비도(!) 위엄있게 바뀐 왕의 모습(그러니까 가짜 왕의 카리스마)에 반하여 진짜 왕에게 ‘왕이라고 주장하는 미친 X’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리고 그의 목에 개줄을 맵니다. 결국 진짜 왕은 미쳐버리고 말죠.
그는 미치기 전에 “저들은 왜 나를 못 알아보는 거야?”라고 외치고, 진짜 재상은 딱하다는 듯이 “몰라서 물으시오? 왕은 얼굴이 없어요. 그들이 보는 건 왕관과 망토 뿐이라니까!”라고 대답해요.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오래된 격언을 떠올렸습니다. 사람이 권력을 만드는 게 아니라 권력이 사람을 바꾼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고요. ‘이래서 사람들이 권력을 남에게 순순히 넘기지 않는 거구나!’라고 생각했죠(한편으로는 재상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관복에 집착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단 말이죠. 그는 자신의 ‘힘’이 관복에서 나온다고 여겼고, 이는 사람들이 왕처럼 차려입은 가짜 왕을 보며 의심하지 않는 것으로 입증되었으니까요).
그럼 새 왕은 어떨까요?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을까요? 천만의 말씀이고 만만의 콩떡입니다. 진짜 왕이 게으르고 멍청하고 사치스러웠다면 가짜 왕은 잔인하고 냉혈한이며 수구파 그 자체였으니까요. 한 예로 그는 망나니에게 “네 도끼를 내놔라. 과인이 써야겠다. 과인의 힘은 이 도끼에서 나오느니라. 도끼로 사형수들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지 모른다.”라고 하고 망나니가 “그럼 저는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요?”라고 묻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너? 넌 기도해라. 과인이 한 놈씩 죽일 때마다 신께 기도해. 과인 곁에서 말이야.”라고 대답합니다(이 말을 듣고, ‘인간 도살자’를 위해 기도회를 열었던 역사 속의 성직자들이 떠올라서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아내인 ‘움무 잇자(아랍어로 “잇자의 어머니”라는 뜻. “움무”는 아랍어로 “어머니”라는 뜻이다. 한국에서 “아무개 엄마”란느 호칭이 쓰이듯이, 아랍에서도 이름 대신 “움무 아무개”라는 말을 자주 쓴다)’가 찾아와서 “남편의 무능함과 사기꾼인 종교 지도자와 탐욕스러운 상인 때문에 죽을 지경입니다.”라고 탄원하자 “그건 어디까지나 그대 남편이 경쟁에서 졌기 때문이고 멍청했기 때문이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사제와 상인들이 뭘 잘못했느냐? 경쟁의 원리에 충실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더 기가 막힌 건 잇자는 왕이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하게 생겼고 재상이 자기 집 하인인 우르꿉과 비슷하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움무 잇자는 “그럴 리가 없다.”며 그저 굽히기에 바쁘다는 것이죠. 진짜 왕이 변장해서 집안 사정을 물어볼 때면 그의 앞에서 거침없이, 큰 목소리로 “남편의 무능함에 화가 납니다. 만약 왕을 뵐 수 있다면 이 버러지 같고 지겹고 지옥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막 고발하고 말겠어요!”라고 말하던 움무 잇자는 막상 가짜 왕을 뵐 기회가 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빌빌 기면서 눈물로 호소하기에 바쁘죠. 저는 여기에서 ‘현실에 화를 내면서도 막상 고칠 기회가 오면 그저 권위있는 사람에게 - 또는 기관에게 - 굽히기 바쁜 기성세대에게는 희망이 없다. 왕관과 곤룡포와 망토 뒤에 숨겨진 참 모습을 볼 맑은 눈을 지닌 젊은 세대여야만 문제를 풀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길들여진 사람들은 역시 다르구나. 뒤에서 욕할 줄이나 알지 앞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군.’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그는 종교 지도자와 상인을 불러 “불온한 기운이 자라지 못하도록 더 강하게 욱죄고 매로 다스려라. 설교 내용에 복종과 찬양을 꼭 집어넣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대들이 과인에게 돈을 바치는 이상, 안전을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여 그들의 지지를 받습니다. 상황이 더 나빠진 것이죠.
그 뒤 자히드와 우바이드가 밤에 거리에서 몰래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은 왕이 달라진(바뀐) 뒤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하면서, “가까운 시일 안에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 텐데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그 부분을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 우바이드 : 곧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 거야.
- 자히드 : 아닐 수도 있지.
- 우바이드 : 억압이 강하면 강해질수록, 그에 맞서는 힘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어. 이건 역사의 진리야.
- 자히드 : 우린 ‘때’를 기다려야 해.
- 우바이드 : 그 ‘때’가 지금일 수도 있지 않겠나? 우린 그 때에 맞춰서 일어나야 한다고. 너무 빨라도, 너무 늦어도 안 돼.
그리고 그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연극을 보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끝 부분이 어떻게 되는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직접 보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감동 그 자체니까요)
연극이 끝났을 때, 관객들은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저도 벅차오르는 감동과 씁쓸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 행렬에 동참했어요. 오랜만에 아주 좋은 연극을 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는 ‘권력과 지배와 속임수, 그리고 그에 따른 억누름을 다룬 이야기는 어딜 가나 똑같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10분이더군요.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에서 파는 안내책자를 산 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권력자가 바뀐다고 해서 그것이 곧 행복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왕좌를 내버려둔 채 왕만 바꾸면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 권력 구조를 내버려 둔 채 권력을 욕하거나 탐낸다면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왕이 없던 시절에 누렸던 자유와 평등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함께 모여 진짜 왕과 가짜 왕을 죽이는 데에서 시작될 것이다.’ - 이것이 제가 연극을 보고 나서 내린 결론인데 마음에 드셨는지는 모르겠군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 아니 오랫동안 - ‘권력’이라는 화두를 붙들고 고민해야겠습니다.
연극을 보고 싶어 하시는 분들을 위해 연극에 대한 정보와 극본을 쓴 작가에 대한 정보를 간단히 소개한 뒤 글을 매듭짓고자 합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연극을 보고 난 뒤 흡족해하고 있는 돌베개가 드림(전 이제 사이달라 완누스 선생의 팬이 되기로 했어요! 이런 훌륭한 극작가를 알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별점 : ★★★★★(만점)
*덧붙이는 글(사족) : 연극을 보다 보니 든 생각인데, 이 연극의 극본을 책으로 출판하면 어떨까요? 연극「고도를 기다리며」의 극본도 책으로 인쇄해서 읽는데, 이 연극의 극본이라고 해서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명작의 극본은 꼭 우리말로 옮겨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는 서점에 달려가서 책을 살 겁니다. 정치학 교과서로는 제격이니까요.
*덧붙이는 글 2 : 저는 이 연극을 보면서 우리의 중세사와 현대사를 떠올렸습니다. 연극에서 게으르고 멍청한 왕이 잔인한 왕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백성들의 삶이 나아진 게 아니듯이, 고려시대에 문신(귀족)들이 다스리던 체제가 군인(무신)들이 다스리던 체제(무신정권)로 바뀌었다고 해서 고려 백성들이 행복해진 건 아니었죠. 오히려 고려의 백성들은 잔인한 무신들에게 온갖 시달림을 당해야 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망나니가 기도하는 사람이 된 건요? 왕에게 아첨하며 체제에 복종하라고 강요하는 종교 지도자와, 왕에게 세금을 바치며 폭군도 환영하는 장사꾼은요? 그들은 우리 현대사에도 나오던 사람들이 아니던가요? 그걸 생각하면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고, 그래서 같은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참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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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왕이다>의 공연 정보
공연 장소 : 서울/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지하철 5호선인 광화문 역에서 내려 8번 출구로 나오면 됨)
입장료 : 3만원
공연 기간 : 9월 3일 ~ 9월 19일
공연 시간 : 월요일에는 공연하지 않음. 토요일에는 오후 3시와 저녁 7시에 공연함. 일요일에는 오후 3시에 공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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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아달라 완누스(Sa'dallah Wannous)
시리아의 극작가이자 연극 이론가. 서기 1941년에 태어나서 서기 1997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시리아에서 태어나 (미스르 - 영어 이름 ‘이집트’ - 에 있는) 카이로 대학에서 저널리즘(언론학)을 공부했습니다. 서기 60년대 후반에는 프랑스에 유학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 있을 때 (서기 1967년) 유태인들과의 전쟁에서 아랍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으며, ‘이런 위기 상황에서 민중을 계몽하고 일으키기 위해서는 대중과 직접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연극은 그 통로가 될 것이다.’라고 판단하고 브레히트의 정치극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아랍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잘못된 정치적 경제적 환경 속에서 정부의 압력과 사회적 억압에 대항할 수 있는 저항의 가능성과 개인의 현실적인 변화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는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시도하려는 일환으로 즉흥연기, 라이브 음악과 노래, 극의 막과 막 사이에 배우가 나와서 이야기를 말하는 연기, 그리고 관중들과의 직접 대화를 소개했습니다. 이러한 가장 인상적인 방법을 통해, 그는 청중들에게 연극을 본 뒤 자유롭게 주제를 토의하고 말로 평가할 수 있는 주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관객들의 참여는 그 연극에 대한 평가와 비평 그리고 소규모의 사회적 현상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연극의 임무는 사건의 표면적 나열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또한 위기에 대한 형식적인 대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살고 있는 환경을 주지하고 문제를 인식하며 상황을 해결하여 환경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연극을 통해 정치문제를 제기하고 사회 속에 서로 얽혀있는 관계들을 고민해 보고 문제 해결을 위한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함으로써 연극을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도구로 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완누스는 70년대 말 시리아의 정치적 상황의 악화(시리아는 ‘아사드’ 집안이 대를 이어 다스리고 있는데, 겉으로는 공화국이지만 실제로는 집회/결사/시위의 자유가 없고 많은 정치범들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 돌베개)로 인해 정치현실에 환멸을 느끼며 펜을 꺾습니다. 그는 10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 한 편의 극본도 쓰지 않았죠.
90년대 초 소련이 무너지고(오늘날에는 소련을 러시아라고 부릅니다 - 돌베개) 세계 정치가 거대한 변화의 움직임을 보일 때 완누스는 암 선고를 받은 뒤 죽음과의 사투를 벌이며 작품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는 서기 1997년에 죽을 때까지 초인적인 힘으로 인생을 돌아보며 회상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들을 1년에 약 2편씩 발표하였습니다.
완누스는 서기 1996년 유네스코와 세계 극작가협회에 의해 3월 27일 세계 연극의 날 ‘올해의 연설자’로 뽑혔습니다. 서기 1963년 세계 연극의 날 행사 이래 아랍 극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뽑힌 것입니다. 이는 세계 연극계가 시리아 극작가의 업적을 인정하고 전반적인 아랍 연극계의 업적을 인정했다는 증거입니다. 완누스는 이날 연설에서 “국가들 간의 대화뿐만 아니라 개인들 사이의 포괄적인 대화”를 주창했습니다. 그는 “연극은 그러한 대화를 트는 출발점과 같으며 그것은 세계의 모든 나라와 문화를 포함할 만큼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완누스는 유네스코 연설 1년 후인 서기 1997년 5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 이상 ‘서울특별시 세종문화회관 서울시극단’의 안내 책자인『왕은 왕이다』에 실린 ‘구미란’ 씨의 글을 줄여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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