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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막내딸이다.
그것도 위로 딸이 셋있는 집안의 막내딸이다.
아무리 베이비 붐 시대에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땅에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이미 자식이, 그것도 우리 나라같은 남아 선호사상이 뿌리깊은 이 땅에서 딸만 셋있는 집안에 네번째 막내딸로 태어나버렸으니... 의무적으로 겪어야만 했던 일종의 서러움같은 것, 말해 무엇하리...
누군가가 '형제가 어떻게 되느냐'는 말에 '위로 언니가 셋이다'라고 하면 으례히 돌아오는 답 '우와...' 그럼 거기에 대항해 '우리 부모님께서는 인간존중 사상을 몸소 실천하신 바, 이미 생겨버린 아이를 지울 수 없기에 낳으셨다'라고 자신있게 말하긴 하지만... 뭐... 실체가 말과 틀린 부분이 많다는 것은 모두 아시리라...
거의 덤으로 태어나버린 인생이란 것을 알았기에...난 어려서부터 꽤나 고집불통에 독종으로, 그리고 어떻게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 이런 저런 말썽을 부리고 또 부려가며 자라났다.
그것은, 자식 많은 집에서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끌고 인정받기 위한 거의 생존본능같은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떤 작품(영화든 책이든 )을 봐도, 난 조금 억울한 상황에서 살기위해 너무 여리기에 많은 상처를 입다가 급기야는 삐뚤어진 성품을 갖게 되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악착같이 살아나가는 사람들에 더 많은 호감이 간다.
물론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아주 바르고 까탈스럽지 않고 성스러운 사람(예컨데 [불의 검]의 소서노같은)이 되고야 말지만...(원래 반대를 좋아하는 법이니...)
[비천무]의 여진 역시도 그러하다.
혹시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지...여진이 진하를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었을까에 대해서...
여진은, 진우량의 여식이다.
그것도 서출이다.
말이 좋아 서출이지 작품속에선 그녀가 스스로를 '사생녀'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그녀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관료들이 있는 자리에서 정치에도 참여하고, 중요한 밀사로도 활약한다.
과연 어떻게 해서일까?
자, 그럼 이제부터 맘대로 한번 상상해봐야지...
여진은 진우량이 젊었을 적 우연히 생겨버린 아이였다.
당시 진우량의 신분으로 볼 때, 여진의 어미는 기생일 수도, 노비일 수도 있다.
혹은 아라처럼 강간당해버린 힘없는 농민의 여식일 수도 있다.
암튼...
그녀는 처음엔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꽤나 설움을 많이 겪었다.
마치, 고구려 유리왕이 그러했듯이.
아마도... 팔뚝힘 약한 어린 여인이기에, 리타라처럼 기가 막힌 상황도 당했을 수 있다.
아뭏튼...
그러다 아버지가 진우량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때까지 떠돌던 곳을 간신히 그리고 과감히 탈출,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이미 '왕'이라는 칭호를 안고 정부인에 첩실까지 주렁주렁 달린 진우량은 이렇게 말한다.
'니 어미가 나만 베개를 같이 베었다고 할 수 있겠냐? 니가 내 자식이라는거 어떻게 증명할래? 그래도 내가 한번 같이 잠자리를 했던 여자의 자식이니 이곳에서 시중이나 들고 일이나 해봐라'
(작품에 나타난 성격으로 봤을 때 충분히 가능성 있다)
그리고 거의 노비취급을 하며 내팽겨쳐둔다.
역시나...또 기가 막힌 상황을 당했을 가능성, 충분히 있다.
그때부터 여진은 가슴 속에 칼을 갈기 시작한다.
인정받고야 말리라... 내 손에 모든 부와 권력을 갖고야 말리라...
더 이상은 힘이 없다는 이유로, 사생녀라는 이유로,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당하지는 않으리라...
어깨너머로 배운 글과 천성적인 지혜와 그간의 세월에서 닦아온 영악함으로 여진은 점차 진우량의 관심을 끌고 꽤나 촉망받는 존재가 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진우량의 다른 자식들이 그녀에 대해 견제를 하게 되고,
여진은 그로 인해 자신을 뒷받침해줄 든든한 다른 세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모종의 합의를 이루게 된 것이 바로 청진방!
청진방의 사사무는 유진하의 아버지를 죽인 후 세력은 커졌지만 진우량을 왕으로 모시면서 왕실과의 모종의 관계가 필요했을 것이고,
이제는 아버지에게 총애받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 그 외에 자신을 또 다시 지원해줄 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여진이니...
그 사이에서 매개체가 된 것이 사사무의 아들 사준이다.
사준과 여진, 둘 사이에 약간의 육체 관계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작품 속에 이미 드러나있다.
물론, 작품에 드러난대로, 여진은 청진방을 등에 엎고 왕실과 관료내에서 자신의 세력이 완전히 굳힌 후에 진하가 나타나자 사준을 사정없이 차버린다.
나는, 진하를 사랑한 또 한명의 여인으로서의 여진에 대해서보다는,
이렇듯 보이지는 않지만 억울하고 또 억울한 가운데 손톱을 세우고 발톱을 세우고 마음 속에 칼을 품고 살았을 여인 여진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마음이 간다.
짙은 화장을 한듯 표현된 그녀의 서늘한 눈매와 함초롬히 다문 작고 요염한 입술을 보면,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화장을 했을까, 왜 그래야 했을까를 생각하며 괜시리 가슴이 찡하니 아파온다...
더불어, 그녀에 대한 이해가 작품 [비천무] 속에선 조금은 부족하게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든다.
([불의 검] 카라의 과거지사가 그렇게나 세밀하게 드러나는 이유는...아마도 김혜린 선생님의 여진에 대한 아쉬움때문이 아닐까...???)
언젠가 때가 되어 다시 만화를 그릴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오래전부터 꼭 그리고싶은 주인공이 둘 있다.
둘 모두 여진과 참 많이 닮았다.
한 명은... 한때는 피도 눈물도 정의감도 없이 오직 청부받은 돈과 계약과 명령에 의해서 어린 아이와 약한 여자도 서슴없이 죽여버리는 자객으로 시대를 흘러가다 연왕밑으로 들어가 정난의 변을 성공시키고 그 이후 원하는만큼 복수를 하며 중국 전역을 피로 물들이는 그런 사람이고,
또 한 명은,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의 자리에 앉아있는 숙부와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황태자인 사촌동생을 감금한 뒤 자신이 모든 권력을 잡고 전쟁을 시작하지만 전쟁이 시작된지 10년만에 전쟁터에서 사망, 이후 자신의 후손뻘인 왕족들에 의해 전쟁과 수호의 여신으로 추앙받고 경외의 대상이 되는 그런 사람이다.
예쁜 주인공들이 예쁘게 사랑하는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이 볼까 말까 한 요즈음...그런 주인공으로 만화를 그리겠다니... 내 꿈이 너무 허황된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싶은 이유는...
아마도 그네들을 통해 '사실일진 모르되 진실은 아닐 수도 있는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상처'에 아직까지도 더 많은 관심이 가는...아직은 어린 나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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