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게시판

게시일시: 1999/05/10 오전 10:00
게시자: 또자
제목: 불의 검[1]

내가 처음 김혜린님의 만화를 접한 것은 아마도 고등학교 2학년 때일 것이
다. 기필코 만화를 끊어버리겠다고 결심을 한지 얼마 안돼 차마 유혹을 뿌
리치지 못하고 어두컴컴한 지하의 만화방으로 기어코 기어들어가서 약간은
참담한 심정으로 골라 든 책이 바로 북해의 별이었다. 그때는 얇은 책으로
17권인가였는데, 왜 정말 `순정`만화라 할 수 있는 것들은 내용은 없이 권
수만 많지 않던가. 그래서 난 이것도 그런 부류거니 했었다. `북해의 별`
이라니! 또 어느 중세쯤의 왕자님인가보다 했었다. 앉은 자리에서 17권을
다 읽고 난 후, 많은 이들이 하는 말이지만 난 소위 만화책이 이렇게 훌륭
할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수많은 소설책과 위인전과 기타 고상하신 책
들을 섭렵하며 찾아 헤맸지만 끝내 찾지 못했던 나의 이상형이 거기 있었
다. `너무 완벽한 인간`이 혜린님에게 쏟어지는 비난의 대부분이다. 하지
만 흔히들 말하듯이 소설과 현실은 구분되어야 하지 않나. 소설은 개연성
이 필수적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허구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현실을
글로서 답습하는것은 읽는 이에게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한다. 뭐.. 적어
도 내가 소설책을 읽을땐 그런 상을 찾는다.
난 혜린님의 작품중에 최고의 걸작이 불의 검이라고 생각한다. 비천무, 아
라크노아(특히 공대생인 나에게 리안 박사 같은 사람은 스승으로라도, 아
니 그런 사람(능력은 십분지 일이라도 좋다)이 있다는 것으로라도 보고싶
은 상이다. 그래서 처음엔 홀대했던 이 만화가 지금은 몇 안되는 내 수집
품에 포함되어 있다), 테르미도르, 기타 여러 단편들도 모두 훌륭하지만
불의 검은 뭐랄까..짙은 뭉게구름사이로 맑은 하늘이 드문드문 보이는, 삶
이란 그럴 거란 느낌을 준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혜린님의 인물들은 유능
하나 그를 빌미로 출세와 권력을 탐내지 않는 순수함이 있다. 꽃같은 님
하나를 평생을 걸고 사랑하는 것도 그런 인성의 연장이다. 착하지만 강한,
그래서 아름다운- 내가 꿈꾸는 (혜린님에게 전염된) 인생이다.
(^^ 업무시간에 글을 쓰려니 아무래도 찔리네요.. 다음기회에 다시 들를께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