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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여자로 살아가기
'소설 <불꽃의 자유혼 허난설헌>과 만화 <불의 검>'
초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젊은 선생님은 나와 친구들을 불러 앉혀놓고 '～답다'에 대한 이야기를 곧잘 해 주곤 하셨다. 정확한 내용은 잘 기억나진 않지만 요지는 너희들다운 생각과 태도를 하라는 것, 꾸미지 않은 순수한 그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여자답다', '여자다운 삶' 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이 물음을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과 만화를 소개하고자 한다.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편집위원이자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 등 여성문제에 확고한 인식을 갖춘 저자 김신명숙은 소설 <불꽃의 자유혼 허난설헌>을 통해 영화 <비천무>의 원작자인 김혜린은 만화 <불의 검>을 통해 여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두 작품 모두 여자를 주인공으로,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의 지향점은 정반대에 위치해있다는 것이다.
언제나 논쟁의 우위를 확보한 주제가 있다.하지만 타고난 공격성과 옳고 그름을 뚜렷하게 판명하기 힘든 성질을 가졌기에 기분 좋은 만남의 자리에서라면 가급적이면 꺼내지 말아야 할 주제가 있다. 또한 이는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그 발전가능성이 무한하기에 급히 파장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삼가는 것이 예의가 될 때도 있다. 혹자는 이해할 수 없어서, 혹자는 경험해 보지 못해서, 혹자는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혹자는 입장이 달라서 등 다양한 이유로 환영받지 못하는 페미니즘.
소설 <불꽃의 자유혼 허난설헌>은 허난설헌이라는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현재 여성이 처한 위치를 진단하고 미래의 여성상에 대해 제시하며 나아가 여성들의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페미니즘의 교과서와도 같은 작품이다.
허난설헌은 조선시대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 여덟살에 시를 지어 신동으로 소문이 날 정도로 뛰어난 시재(詩材)와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억눌리고 고통받다가 스물일곱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이다.그 당시의 사대부 며느리로서 갖춰야 할 능력보다 여자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재'라는 남성적 재능으로 인해 고통받아야 했던 허난설헌의 이야기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여인의 슬픈 서사시이다.
소설에 의하면 허난설헌의 불행은 세 가지로 응집된다. 하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며, 하나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며, 하나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이다. 작가는 허난설헌의 불행을 발판삼아 여성이 갖추어야 할 새로운 덕목에 대해 연설한다. 첫째는 자아 인식이 강한 자유분방한 사고이며 둘째는 잘못된 세계에 대한 반항정신이며 셋째는 솔직한 자기표현(사랑의 표현)이며 넷째는 새로운 세계의 건설 즉 이제까지의 잘못된 세상에 대한 개혁이다.
여성의 삶이란 남성권력이 지배하는 가부장적 사회에 의해 파괴되는 불행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여기에 자신의 재능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노리개보다 못한 것이며 여성의 삶이란 남성(남편)을 보조하기 위한 존재 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여성의 삶이 존중되는 '잉모도'라는 가상의 섬을 꿈꾸며 그러한 곳을 만들어 나가자는 실질적인 주장으로 발전되고 있다. <불꽃의 자유혼 허난설헌>은 여성에 의해 쓰여진, 여성을 위해 쓰여진, 여성의 글이라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허난설헌이라는 실제인물을 조명함과 동시에 여성의 의식개혁과 함께 적극적인 실천을 요하는 독자들의 머리와 의지에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폐간과 휴간을 반복하는 고달픈 한국 출판만화 역사의 산증인인 김혜린의 <불의 검>은 올해로 태어난지 십년째 되는 해이다. 문화의 험난한 역사를 한 몸에 안고 있는 <불의 검>은 여성의 삶을 찾아 기원전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의 검>은 북만주 일대를 배경으로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격변기를 그린 가상의 역사극이다. 순정만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기에 멋진 왕자님과 그에게 선택되기를 기다리는 아리따운 공주님의 달콤한 러브스토리를 짐작한다면 오산이다.
<불의 검>에는 역사를 이끌어가야 하는 나약한 지도자의 고뇌, 전쟁에 의해 희생되어야 했던 민초들의 삶과 그들의 희노애락을 보여준다. 그 속에 만남과 헤어짐, 사랑과 기다림, 전쟁과 파괴, 죽음과 살인, 강간과 탄생 등 인간사의 다양한 모습들이 펼쳐진다. 하지만 <불의 검>은 무엇보다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철제 칼(불의 검)을 만드는 여자 주인공을 비롯하여 주술의 능력을 가진 여자, 쿠테타로 정권을 차지한 여자, 왕비와 후궁 등 다양한 삶의 질곡이 깊게 배어있다.
그 중 불칼을 빚는 주인공 '아라'와 남성에 대한 복수심 인해 여자들의 세계를 건설하려는 신녀 '카라'는 뒤틀린 페미니스트로 <불의 검>에서 주목해 볼 만한 여성 캐릭터들이다.
카라는 남성들에 의해 생식능력을 잃어버린 후, 그로 인한 상처를 남성으로 인해 보상받으려 한다. 나아가 남성을 밟고 올라가 여성의 세계를 건설하려는 피를 부르는 반정의 주인공이자 나약한 여성의 눈물을 증오하는 급진적인 성향의 캐릭터이다. 페미니스트의 전형이자 생식능력이 없지만 모두의 어머니라는 모순의 주인공이다.
아라는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지만 곧 헤어지게 되고 다른 부족의 남자에게 납치되어 원치않는 아이까지 낳게 된다.여기까지는 흔하디 흔한 비운의 드라마 주인공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아라가 차이점을 갖는 것은 그 이후이다. 철기에 의해 정복당한 자신의 부족에 철제검을 가져다 주기 위해 죽을 노력을 해서 철제검 제조방법을 익히고 이를 자신의 부족에게 넘기게 된다. 비록 천한 신분에 다른 부족의 아이까지 낳게되어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런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익힌 것이 철을 만드는 기술이고 그로 인해 결국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다. 또한 비운의 여성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원수가 되는 남자까지 그의 아픔을 포용하며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기에 이른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여성의 위치는 한없이 낮다. 정치적 권력을 갖지 못했던(이점에 있어서는 과거나 현재나 매 한가지이다) 여성은 언제나 수난의 대상이었다. 물론, 전쟁을 일으키는 전쟁터의 최전방에 서서 가장 먼저 희생되어야 했던 것은 남성이지만.. 그렇게 따지고 보면 역사의 희생양은 남성과 여성을 떠나 언제나 이름 없고 힘없는 민초라 말하는 것이 옳바른 표현일 것이다.
아라 또한 그러한 민초의 하나이다. 전쟁에 님을 빼앗기고,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고 험난한 세월 속에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해 울며불며.. '그래도 살아야지...' 라는 오롯이 삶에 대한 의지와 행복에 대한 막연한 꿈을 생명수로 먹고 살아온 여성의 표본이다. 여성의 삶이란 게 보잘 것 없고 그다지 기쁠 것도 없지만 여성은 역사가 시작하는 그 옛날부터 삶에의 의지, 행복에의 의지라는 거룩한 숙명을 묵묵히 일구어 나갔던 우리들의 선조, 우리들의 어머니인 것이다.
피를 부르는 개혁을 무릅쓰고라도 억압받고 나약하기만 했던 여성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또 그들만의 이상향을 만드는 것이 여성의 꿈일 수 도 있지만 아무도 눈길하나 주지 않는 곳에서 짓밟히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자신을 짓밟은 대상까지도 포용했던 착한 여인들도 결국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우리의 삶이다.
결국 삶은-비록 자신에게 상처를 줄 망정-세상의 모든 이와 더불어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작가는 주인공 아라를 통해 표현한다. 그리고 그 속에 숨어있는 포용과 관용은 칼과 피보다 더 강한 힘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소설 <불꽃의 자유혼 허난설헌>이 독자의 머리에 작용하는 것이라면 만화 <불의 검>은 독자의 가슴에 작용하는 작품이다.
<불꽃의 자유혼 허난설헌>과 <불의 검>은 비록 서로 다른 성격의 작품이긴 하지만 여자의 삶, 올바른 여자다운 삶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지 그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이건 포용적인 휴머니즘이건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말할 수 도 없으며 둘의 경중을 판가름할 잣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과 만화속의 주인공들은 분명 두 작가는 여성에게 짐을 떠넘겨 주었다. 이제 그 짐을 버리든지 끝까지 지고 나가든지, 선택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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