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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장판이 나오기 전의 글이군요..

김혜린 <테르미도르>

설 연휴 첫 날 우연찮게 TV에서 영화 <피스 메이커>를 보게 되었다. 헐리우드의 자국 우월리즘이 당연하게 여지없이 배어나오는 영화였지만, 미+권력+지성+인간미의 집합체로 나온 니콜 키드먼의 차가운 아름다움에 혹하고 조지 클루니의 시원시원하고 아귀가 딱 들어맞는 액션이 호쾌하여 끝까지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남긴 가장 강렬한 인상은 니콜 키드먼이 걸친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의 아찔함도, 조지 클루니의 니끼한 미소도 아닌 그들의 상대역(악역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으로 설정된 세르비아 테러리스트의 절규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아이는 왜 죽었지? 웃은 죄? 내 아내는 왜 죽었지?!
그는 배낭에 핵을 가득 지고 뉴욕의 거리를 걸으며 조국을 보았다. 웃으며 지나가는 가족의 모습에서 이유 없는 총탄에 쓰러진 아내와 아이를 보았다. '거리에서 이유 없이 죽은 내 아이와 내 아내를 돌려놔 줘.' 필자의 가슴에 콱 박힌 것은 '민족'이라던가 '조국', '이념'이 아닌 '아이'와 아내'였다. 테러리스트는 평범한 피아니스트였고, 테러를 예고하는 비디오테이프에서 그는 자신을 당신들과 똑같은 한 '인간'일 뿐이라고 소개한다. 그의 테러는 민족을 향한 것이 아닌 잃어버린 자신의 가족에 대한 아픈 절망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 때 <복수는 나의 것>이란 영화가 떠올랐다. 보지 않았지만 플롯을 듣고 제목을 씹어 보는 순간 머리 속에서 완벽한 감상이 이루어져 버렸던 영화였다.

그렇지… 복수는 정말 자신만의 것인 것을.
너무나도 단순한 진리를 품고 있는 제목이어서, 영화가 본래 가지고 있을 내용이나 의도에 개의치 않고 제목에 심취해 버렸다. 누군가 나의 가족에게 해를 입혔을 경우 법적인 대응, 즉 감옥에 보내거나 손해 배상을 받거나 하는 등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았고 상대방에게 충분한 벌을 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까?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대한 복수는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 된다. 사회는 나에게 어떠한 감정적 위로도, 복수도 해 줄 수가 없다. 헐리우드의 단순한 블록버스터라고 생각했던 <피스메이커>가 연휴 첫날 뜻하지 않은 감동을 안겨 주며 작품 포커스에까지 연결되었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개인적인 복수가 하나의 테러로 이어질 수 있는 그 절망과 비탄 말이다. 물론 그것이 설득력 있었던 것은 민족적, 역사적 배경이 있어서라는 기묘한 이유가 바탕 되지만.

우리는 이것을 만화에서도 본다. 김혜린의 만화는 시대의 거친 조류 속에 상실된 개인의 삶과 사랑을 올곧게 보여 준다. <불의 검>에서 아라와 산마로가 그렇고, <비천무>에서 설리와 진하, <테르미도르>의 알뤼느와 유제니가 그렇게 스러져 갔다(<불의 검>은 조금 보류해 두자, 아직 완결되지 않았으니…). 왜 그럴까, 위의 영화들을 스치고 나자 <테르미도르>가 왜 이리 눈에 밟혔을까.

검고 거친 머리로 가려 그 어두움을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눈을 한 유제니가 단두대 앞에서 절망하던 모습이, 알뤼느의 손수건을 쥐고 날 듯이 쓰러진 그가 생각난 것은 그의 행보가 당시의 이념에 부응해서만이 아닌, 개인적 증오에 근거했었다는 희미한 감상 때문이었다. 그가 지고 온 어머니의 아픔이 시대의 조류에 그를 태운 것이리라.

김혜린의 작품이 다른 대하 서사극보다 독자를 더욱 깊숙이 끌어당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시각이 아니더라도, 극 중에서 줄르가 알뤼느에게 하는 독백에서 보이듯이 전쟁터 속의 여인들은 역설적으로 남성들보다 강하고, 꿋꿋하다. 전쟁 속에서 '죽임'을 맡은 남성들과는 달리 '살림'을 하는 그들은 '사랑'을 원천으로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혜린의 시선은 이 강한 '사랑'에 못 박혀 있으며,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죽임'의 역할과 이 '사랑'의 원천 속에서 시대를 살아가는 행동과 '복수'의 갈등을 겪는다. 그것이 김혜린의 만화에서 보여지는 아름다운 차별성이며, 독자에게 감정 이입을 쉽게 하는 이유이다.

이제는 사서 볼 수도, 쉽게 빌려 볼 수도 없는 만화가 되어 버린 <테르미도르>. 온라인을 통해서라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테르미도르는 끝났지만, 세르비아의 피아니스트가 뒤를 잇고, 한국의 평범한 아저씨가 그 뒤를 다른 걸음걸이로 걷고 있구나… 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다시 마우스를 딸각거리며 유제니의 뒤를 몰래 쫓아간다. 그리고 가슴 아프게 미안하다. 너의 아픈, 피 묻은 발걸음을 난 이리도 편히 앉아 감상한다는 것에…

2003년 02월 03일 이코믹스 웹진 Vol,6 No.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