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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반님 안녕하세요 저번에 약속드렀던 그 불의검 논문입니다. 너무 길어서 한글화일로 13장정도 되는 군요. 따로 한글화일을 올려드릴께요 어디로 올려야하나.
연락주세요. 워드로 잘 정리해놨답니다.
만화 속 여주인공의 자아 찾기 : 김혜린의 <불의검>
1. 김혜린의 작품 세계 - 깊이의 미학
제9의 예술로서 그 위상이 많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만화는 여전히 타 예술 장르에 비해 열등한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 만화가 예술안가 아닌가의 논란 자체는 무의미하다. 장르 자체의 속성이 예술성을 담보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작품' 그 자체인데, 그런 의미에서 작가 김혜린의 작품들은 특기할 만하다.
김혜린 작품들은 한결같은 주제라 한다면 역시 '역사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가지는 미학은 이러한 인간들이 엮어 가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깊이'에서 찾을 수 있다. 주제와 역사 인식의 깊이, 인물의 깊이, 인물의 깊이, 내러티브와 대사의 깊이, 그림의 깊이…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깊이의 미학'이라 부를 수 있겠다
주지하다시피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와 더불어 세세한 복선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의 치밀한 전개와 저마다 인간 내면의 본질적인 모습을 성찰할 수 있도록 기회를 던져주는 인물의 군상은 김혜린 만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혀왔다. 이 점이야말로 전형적인 유형의 인물들과 '우연'하게 진행되는 사건으로 구성된 여타의 만화들 속에서 그의 작품을 단연코 빛나게 하는 미덕이 아닐 수 없다.
대사가 지니는 은유적 상상력은 대사 하나하나가 시를 읽는 듯한 깊이를 느끼게 한다. 그의 시적인 대사들은 인물의 감정을 결코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이 갖는 지적인 이미지는 상당부분 그 작품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멋스러운 언어 사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이 그림의 특징에 대해서 말하자면 액션의 다양함이라든가 인물들의 서서함 감정까지 묻어나는 배경 분위기 연출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각 인물의 캐릭터이다. 순정만화 의 경우 대체로 표현해낼 수 있는 캐릭터가 한정되어서, 비슷한 또래의 비중 있는 역할을 가진 각 인물들의 변별성의 주로 헤어스타일과 색상의 차이에서 드러난다. 반면,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얼굴들은 각 인물의 성격이나 역할과 자연스럽게 조화되어 있다. 각자의 개성이 녹아 있는 얼굴 생김생김을 대하노라면, 인물 하나하나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절로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김혜린이라는 한 만화가의 작가적 깊이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통찰력에서 드러난다. 인생의 길흉화복이나 생장과 사멸에 대한 서사의 완결구조의 폭이 한 개인이나 소수 집단에 머물러 있지 않고 민족이나 국가의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순정만화의 디테일을 살리면서 장편 역사 서사물을 엮어 나갈 수 있는 작가적 역량의 깊이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요소이다. 이러한 깊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인물의 이름 하나에까지 철저한 고증이 이뤄질 정도로 작가 자신이 충실한 공부를 소화해내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그야말로 그의 작품 세계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닌 것 같다.
2. 삶과 사랑의 노래-불의검
김혜린의 탁월한 작품들 중에서도 <불의 검>은 그의 작품 세계의 절정을 보여준다. 삶과 사랑의 대서사시 <불의 검>의 내용은 바야흐로 청동기 문명에서 철기 문명으로 나아가는 시기의 만주 벌판을 배경으로 아무르 부족의 전사 대수장 가라한과 갖은 고생 끝에 아무르에 철검을 전해주는 여주인공 아라의 사랑 그리고 철기를 쥐게 된 아무르족이 카르마키족으로 부터의 해방전쟁에 나서는 과정을 그 축으로 하고 있다.
<불의 검>에 유독 수많은 찬가가 쏟아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작품이 여성존재와 그 힘을 무대 한가운데로 가져'왔다는 점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의 여주인공 아라가 기존의 순정만화 여주인공과는 여러 면에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많은 순정만화들이,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여성의 욕망을 드러내며 그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남성을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표현방식에 있어서는 남성의 시선과 욕망을 대변하다. 즉 여주인공의 역할이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여성의 가치와 미덕이 전적으로 남성의 시선에 의해서 결정되어 궁극적으로는 남성의 시각에 의해서 여성의 정체성이 구성되는 한계에 다다르는 것이다. 이는 남성 우월적 지배 논리를 여성 스스로가 내면화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불의 검>의 아라와 그 외 여성인물들(소서노, 카라, 우이 등)은 바라봄을 당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자신과 세계를 스스로 바라보는 당당한 주체로서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분명히 이와 같은 여성 캐릭터의 형상화는 이 작품이 갖는 가장 큰 매력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런 점 때문에 이 작품을 페미니즘으로 이야기하려는 시도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정준영은 <불의 검>이 "독자적인 여성의 삶에 대한 송가"로서 그 계기가 모성이라고 주장하고, 신녀와 모성애의 역할이 순정만화가 페미니즘 만화로 넘어갈 수 있느냐를 판별하는 걸림돌이자 기반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여성이랑 모성의 역할을 통해서만 비로소 자기 정체성과 존재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뿌리깊은 믿음이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 사회가 역사적으로 '여성+모성'이라고 본질화 해왔고, 일반적으로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최상의 가치로 인정하지만, 실제로 여성의 삶은 다양한 측면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페미니즘을 지향한다면 그것은 바로 여성 주체적인 관점과 경험을 얼마나 반영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모성)와 딸(처녀성)로 환원되지 않는 여성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의 형상화라는 보기 드문 업적에 대한 찬사와는 별도로, 기실 <불의 검>이 페미니즘 작품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따지는 것 자체는 사실 무의미하다고 본다. 이 점에 대해서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성에 대해 내가 가진 생각은 남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아름답기도 하고 때론 추하기도 하고, 나는 '남녀평등'보다는 더 넓은 의미에서 '인간사회의 정의'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그간 '대상'으로서 머물던 여성이 '주체'로서 등장한다는 점에 고무되어서 무조건 페미니즘 운운한다면, 이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협소하게 만들 소지가 분명히 있다. 작품의 중심에 등장하는 여성을 바라보되, 그 여성을 둘러싸고 잇는 환경과 그 속에서 어떻게 그녀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성해나가는지 또 그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총체성으로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 글은 여주인공 아라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확립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이 작품에서 지향하는 인간 사회의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탐색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정체성의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자아 개념이다. 자아라는 것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개인의 고유하고 인성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정체성은 이러한 자아가 사회적으로 표현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아가 인간 내면의 본질적인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의 끝임 없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구성된다는 점이다. 즉 한 개인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그 개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끊임없이 창조해나가는 개인이다.
물론 자아란 그 내용이 완전히 텅 빈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개인이 어떤 자아의 소유자가 되는가는 그 사람이 행하는 노력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그저 '자기 자신을 다 잘 알게 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일관되고 가치 있는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한 보다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목표에 닿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근본적인 자아 탐색의 과정은 곧 인물이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확립하려는 과정이 된다. 다시 말해서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메커니즘은 자아와 세계의 상호작용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자, 이제부터 우리의 여주인공 아라의 자아 탐색 여정을 따라 나서기로 한다.
3. 존재의 인식 - 이름을 부르다
명명(命名)이란 존재에 대한 인식의 시작이다. 상대방의 존재를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준다는 것은 무로부터 유를, 허무로부터 존재를 이끌어내고, 그 본질을 규정해주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불의 검>의 시작을 보자. 철검을 찾아서 카르마키에 잠입했던 가라한 아사는 결국 군대에 쫓기다가 칼을 맞고 쓰러져서, 실카강으로 떠내려온다. 마침 그것에 숨어살던 큰마로와 그의 딸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지고 기억을 잃은 채로 그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큰마로의 딸'로 물리던 맑은 소녀는 이 남자에 의해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된다. 또 기억을 잃고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겪고 있는 그 남자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아라와 산마로…정체성 형성의 시작이다.
"아라…가 더 어울리겠다."아마도 예쁘다는 뜻일 거야. 마음에 안 드나?"
"조-좋아요. 내 이름은 이제부터 아라야! 나…도 이름지어줄게요. 산마로! 산사나이-"
실카 강가에 숨어살던 한 소녀의 자아는 '아라'라는 이름과 더불어 구성되기 시작한다. 가라한의 경우에도 완전 무의 상태가 외었다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자아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분명한 것은 '아라'와 '산마로'라는 이름을 갖고 시작하는 그들의 삶의 계기가 '사랑'이라는 점이다.
과거를 모른다고 지금을 살아갈 자격조차 없는 것 아냐!
너는 아라, 나는 산마로다… 내가 너에게 준 이름, 네가 나에게 준 이름.
그런데 더 무엇이 필요해.
여기에서 여주인공 아라가 가라한에게 일방적으로 이름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이름을 준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적어도 아라의 삶이 남성 이데올로기에 휘둘려서 수동적으로 남성의 선택을 기다리는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넘어서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름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임을, 또 그렇게 완성되어야 함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서로에게 이름을 주는 이 행위야말로 주인공들의 자아 찾기 과정의 가장 중요한 계기이며, 또 그들에게 닥치는 그 모든 위기를 무릅쓰고 자신의 지탱해나가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본격적인 자아 찾기 과정에 나서는 그들에게 일련의 시련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시련의 첫 시작은 당연히 그 '이름'을 잃게 되는 것이리라.
"날 잊지마- 날 기억해야돼! 당신을 찾을 거야! 잊지마- 산마로"
아라는 그들의 은거지로 쳐들어온 카르마키의 야장 수하이바토르에게 끌려가게 되면서, '실카 강가의 아라'를 잃어버리고, 산마로는 그녀를 찾으러 가는 과정에서 아라에 대한 기억과 '산마로'라는 이름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이들의 자아 찾기 과정의 내용이란 바로 자신들의 이름을 되찾고 서로에게 다시 그 이름을 불러주는 바로 그것이 될 터이다.
4. 순정만화 속의 강간 - 울타리를 넘어서라
아라가 수하이에게 강간을 당하는 장면은 순정만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강간이라는 경험이 여성에게 있어서는 극단적인 불안과 공포감을 유발하고, 그로 인해서 원치 않는 임신이 생길 수 있으며, 대인기피증 등과 같은 행동의 제약을 받게 되는 등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사회적 피해가 막심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치명적인 손상을 끼칠 우려가 있는 까닭이다.
여주인공의 강간을 당한다는 설정이 파격적인 이유는,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순결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에서 그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여성의 성적 기능의 남성의 혈통 계승과 상속자 출산을 위한 생식 기능으로서만 최상의 가치를 인정반기 때문에, 혈통의 순수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순결과 정절은 여성에게 절대적인 의무로 강요되어왔다. 자연, 남성과 여성에게 성윤리가 차별적일 수밖에 없다. 남성은 성적 본능이 강한 존재로, 여성은 성욕이 없는 존재로 간주되며 이와 같은 이중적인 성규범안에서 각각 사회화되는 것이다. 예컨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윈수연의 <풀하우스>주인공 엘리와 라이더는 여성 스스로가 이중적인 성윤리를 어떻게 내면화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작품은, 성욕이 없다 못해 공포감마저 발산하며 '정숙함'을 여성의 최고 가치로 구현하는 엘리와 분방한 사생활에도 불구하고 연인의 순결만은 고이 지켜주려는 낭만적 사랑의 화신 라이더를 밀고 당기는 사랑싸움이 주 내용을 이룬다. 라이더가 그녀의 '순결'에 대해 의심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고, 그녀의 순결함을 확인함으로써 두 사람이 완전한 결합을 이루게 되는 과정은 이 작품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얼마나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순정만화의 경우, 여주인공이 좀처럼 강간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야말로 순정만화의 주 독자층인 소녀들의 판타지를 깨뜨려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예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가령, 김기혜의 <설(雪)에서는 여주인공 성은이 소녀 시절에 윤간을 당했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설정은 여주인공이 성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을 남성으로 동일시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주는 기능 이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즉 성폭력을 당한 피해 여성의 입장이 적극적으로 조명되어 있지 않고, 이와 같은 극단적인 경험을 통해서 여성 스스로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 의식이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성폭력을 당한 피해 여성들은 수치심을 인한 정신적 고통을 가장 큰 피해로 꼽는다고 한다. 수치심은 자아 정체성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데, 이는 수치심이 치욕스러운 감정을 야기하는 어떤 경험에 의해서 자극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그 사람이 일관되고 안정되게 자신의 삶을 지탱해나가지 못하도록 계속적으로 불안감을 양산해내는 까닭이다. 그런데 수치심은 분명히 죄의식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수치심이 이상적 자아 속에 구축된 기대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한다면, 죄의식은 규약이나 금기의 위반과 관계된 개별적 행동들과 관련되어 있다. 즉 수치심은 자신이 부적절했다는 느낌인 반면 죄의식은 자신이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파괴적이고 부당한 폭력으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이 죄의식와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아라가 '강간을 당한다'는 설정이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아라 스스로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벌어진 일이 아님을 인식하고, 광포하고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얼마나 당당하게 다시 일어실 수 있느냐의 문제가 관건이 된다. 다시 말해서 '순결 이데올로기'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울타리를 넘어서,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구성해나갈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하겠다.
5. 산다는 것은… - 불의 검을 벼르다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한 그녀가 가까스로 일어나는 계기는 이렇다. 카르마키에게 아내를 잃고 어린 딸의 손을 붙잡고서 산 속으로 숨어 들어오던 날, '죽어버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영상이 떠오르는 순간, 그녀의 귓가에 '땅'하는 야장소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강철을 연마하기 위해 매달리던 산마로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녀는 일어서고, 수하이에게 철검 다루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살다가…살다가… 산마로와 만나게 되면 내가 만든 철검 한 자루 건네주고 싶어.
…더럽혀진 몸은 그때 죽어도 늦지 않아…
내가 검을 만든 건 살기 위해서- 무엇이든 삶의 기둥이! 덧없는 희망이라도 꼭 끌어안아야 하니까…
불아…불아! 님에게 내 마음을 전해 줘! 세상 모두가 업신여기고…아예 잊어버려도 아라,
아직 여기 살아있다고! 연기랑 불길에 가리워서 눈물도 마르고 온통 가슴이 새까매져서…
그래도 열심히 살아 있다고!!
그녀의 살아야 한다는 의지는 철검에 대한 집념으로 나타나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철검을 매달릴 때 처음부터 스스로의 대한 신뢰감을 회복하고 일을 시작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게다가 처음에는 자신이 당한 부당한 폭력에 대해서도 정확한 문제 의식을 갖지 못하고, 다분히 죄의식과 연결되어 자책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철검에 몰두하는 이유는 언젠가는 산마로를 찾아서 그에게 철검을 전해주고자 하는 희망 때문이다. 살아가기 위해서, 덧없는 희망일지라도 부여잡으려고 정한 목표이지만, 이것은 거꾸로 그녀에게 살아가는 유일한 흼과 의지가 돼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살아 있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글은 윤리 교과서가 아니므로 생명의 소중함 같은 도덕적인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아라에게 있어서 살아 있다는 것은 죽는 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기에 가치가 있다. 그녀 스스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점차 의식한다는 사실은 자신에게 가해진 부당한 폭력에 대한 그녀로서는 지독히도 능동적인 저항이 된다. 또 그녀가 살아 있음으로 해서 그녀는 산마로를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실카 강가의 아라'로서의 본질적인 자아를 재구성해 가는 일에 기대를 걸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철검에 대한 집념 결국 철검의 완성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아라가 능동적인 삶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사실 그녀가 불의 검을 완성해낸 일이야말로 이 작품에서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아무르족이 카르마키로부터의 해방 전쟁에 나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철검을 손에 넣어야만 하는데, 가라한조차 철검의 기술을 빼내기 위해 카르마키에 잠입했다가 실패한 것을 상기할 때, 철검의 완성은 큰 의의를 지닌다. 여성의 삶과 그 가치가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는 사적인 공간 안에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영역으로 확대되어 여성의 존재와 그 힘을 무대 한가운데로 가져왔다는 점은 커다란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당신의 노리개로 아무리 호강해도 그 아라는 시체… 님을 찾아 헤매다 얼어죽는 편이 진짜 나예요.
아라는 드디어 수하이로부터 탈출을 감행한다. 부당하고 광포한 폭력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수하이가 아라에 대해 갖는 집념은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고, 그녀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또 소위 몸을 정복당했기에 일평생 카르마키의 여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전통이라는 경로 안에서 고정된 여성의 삶이다. 하지만 이를 박차고 의식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행위는 주체적인 자아의 각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영원히 발이 묶여버릴 수 있는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드디어 그녀의 자아가 꿈틀대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위기를 오히려 새로운 기회로 바꾸려는 그녀의 적극적인 노력이야말로 그녀가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능력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탈출 과정에서 그녀는 이후 평생의 조력자가 될 바리를 만나고, 눈 덮인 설원을 간신히 지나 산마로를 찾겠다는 처음의 약속을 성취해낸다. 비록 그녀가 만난 사람은 산마로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가라한이지만, 처음의 소망대로 그녀는 가라한에게 '불의 검'을 바친다.
6. 노동의 의미 - 생활하는 어머니로 거듭나기
'산마로'를 기억하지 못하는 가라한과의 재회는 그녀의 자아 탐색 여정이 여전히 지난하리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의 삶 속에서 또 다른 위기를 맞게 되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앞에서 언급한바, 그녀에게 있어서 자아 찾기의 내용이란 '실카 강가의 아라'라는 이름을 되찾고 다시 '산마로'를 부르는 것이어야 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라한에서 억지로 '산마로'의 기억을 환기시키려 하지 않는다. '산마로'를 잊으려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가라한'으로서의 삶을 이해하려는 마음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는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된다.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모성은 흔히 본능이라고 오해하기 쉬운데, 모성이란 여성이 어머니로서 갖는 감정·이성·의지 등의 특성을 말한다. 따라서 모성에서 중요한 점은 바로 어머니의 입장에서 모성의 경험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간단히 말해서 어머니 역시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만약 모성이 정말 본능적인 것이라면, 임신한 사실에 절망하여 아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하는 행위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님 보기 부끄러워서 외로운 두 눈 너무 마음 아파서…나는 차마 님 먼저 죽을 수도 없네.
이번에도 역시 그녀가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갖게 되는 계기는 산마로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번에도 철검을 벼르는 '노동'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철검을 벼르는 노동의 의미가 변화를 겪는다는 사실이다. 즉 단순히 살아야 한다는 의지의 몸부림을 넘어서서, '우리 봄'을 맞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보다 공적인 영역에 대한 각성으로 확대되고 있다.
사람잡는 무기라 소름돋는 일이어도 내 남 피일랑 아끼고 우리 봄 활짝 피게 도움 닿는 일이라면
나는… 누가 뭐라 건 얼마든지 불과 벗해 불과 싸워나갈 수 있어!!
노동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와 성취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인 자립이다. 그 첫 번째 의미의 구현으로서, 철검을 벼르는 '노동'은 그녀에게 자아 실현의 기회를 제공한다. 즉 노동을 통해서 그녀는 연이어 펼쳐지는 고난과 위기를 뚫고, 다시 자아에 대한 신뢰감을 점차로 회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아에 대한 신뢰감의 회복이야말로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요소이다. 곧 철검을 벼르는 노동의 과정은 그녀에게 있어서 정체성을 구성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널 보고 힐끔대는 사람들도 사실은 나빠서가 아냐.
엄마한테 수군대는 사람들도 모질거나 나빠서가 아니란다…
그래, 비굴해지진 말아야지!
네 무게가 천근같아도, 내 가슴에 아무리 시린 바람이 불어도, 나는 실카 강가의 아라.
기든스는 안정적인 자아 정체감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삶이 연속성을 갖고 있다고 느끼며, 이런 느낌을 성찰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많든 적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그 사람은 자아의 온전함을 위협하는 많은 위협들을 일상생활의 습관적 행동 속에서 '걸러내는' 스스로에 대한 신뢰감을 확립해두고 있으며, 충분한 자존심이 있어 자아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지속시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어음에는 아라에게 적대적이었던 청산녀와 같은 이들이 적극적인 조력자가 되고, 위험한 고비마다 실질적인 후원자 역할을 하는 바리가 거꾸로 그녀를 통해서 삶에 대한 희망과 위안을 얻게 되는 것, 그리고 자신을 향한 손가락질과 냉대 따위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행동은 아라가 그만큼 자신의 삶 속에서 안정감을 되찾게 되었다는 반증이 된다.
노동의 두 번째 의미로서의 경제적 자립은 그녀에게 있어서 모성의 구성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다루랑 함께 남부럽잖게 살려면 내가 일을 해야 하니까.
…언젠가는 내가 아무르 제일의 야장이 될 거니까!
삶에서의 성취감을 얻으면서 그녀는 아이에 대해서도 어머니로서의 책임감과 애정을 점차 견고하게 다져나간다. 결국 모성애의 원천은 어머니 스스로의 삶을 알차게 살아가는 것이 전제가 되는 것이다. 앞에서 '강간을 당한다'는 설정이 의의를 가지려면 자아에 대한 주체적인 각성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아라가 원치 않는 임신을 통해서 얻게 된 아이에 대한 모성을 구성해나가고, 노동을 통해서 삶의 주체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은 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지적해두고 싶은 점은 야장일이라는 공적이고 전문적인 영역에서의 성공이,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신화적인 여성을 상정하여 이를 통해 거꾸로 여성을 억압하는 슈퍼우먼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기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아라의 삶이, 완벽하고 화려하게 '일하는'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고생스럽지만 성실하게 '생활하는' 어머니로서 그려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시 새로운 끔을 갖게 된다.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봄'이 오면. 힘센 쇠로 무기가 아닌 '흙이나 땀을 묻히는' 다른 걸 만들겠다고, 그리고 다루와 함께 착하고 용감하게 살겠다는 꿈.
하지만 노동을 통해 얻게 된 일련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온전한 정체성을 확립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산마로'를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를 얻기 위해서는 또 새로운 위기가 필요하다. 그 위기는 곧 찾아온다. 다시 수하이에게 끌려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녀는 가라한을 옭아매려는 카르마키의 마녀 카라의 손아귀에 붙잡히게 된다.
7. 정체성의 확립 - 진정한 사랑과 건강한 삶으로의 지향
고로에서 불을 질러 위험에 처한 가라한의 부대를 구하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그의 부하 형압을 구해내며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마녀 앞에서도 "노예나 벌레의 마음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오"라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을 만큼, 그에 대한 '사랑'을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아라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미는 가라한의 손을 그녀는 단호히 거절한다.
나는 님의 발목을 묶는 사슬이 아니요, 님의 기개를 가두어 두는 새장이 아니다.
푸른 용의 아리따운 이름에 티를 묻히는…염치없는 창부가 아니다!
나는…오랑캐 아기의 어미! 봄을 기도하는 풀들 중의 하나다.
우선은 그가 산마로의 이름을 아직 되찾지 못한 것과 일족의 전사대 수장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지고 걸어가야 하는 그를 배려하는 마음 때문에 그를 내치지만, 그 무엇보다도 아라 스스로가 온전한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즉 그녀가 자신의 진심을 배반하며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려는 행위는 전적으로 자신감의 결여에서 비롯되는 데, 자신감이나 자부심은 온전한 자아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가라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산마로'라는 이름을 잃어버리고 난 이후 그는 줄곧 '정체 불명의 통증'에 시달리게 된다. 가라한의 불안정한 심기는 주로 그를 수행하는 미루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차마 아라에게 더 이상 손을 내밀지 못한다. 순수하고 정렬적이었던 '산마로'와는 달리, 그는 가라한으로서의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번뇌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그는 비겁한 도피처로서 해조 공녀와의 혼인을 선택한다. 이 혼인이 그에게 안정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결국 '산마로'로서의 정체성을 되찾는 일은 그에게도 역시 중요한 과제가 된다.
그녀가…그자에게 끌려갔다…그녀를 살려줘!!… 그녀 없이는 산마로란 이름도 없어.
그 안개 속은 마냥 괴로웠지만 이 현실의 괴로움은… 좀 다르다.
묘한 두근거림. 온 몸의 신경이 하나하나 자유로이 펄펄 살아 뛰는 이 느낌!…
나는 싸울 것이고 또한 싸우기를 원한다!
미치도록 사랑하기를 원한다! 그래… 이것이 나의 본 마음이다!!
가라한을 쫓아 피를 토하며 달려온 바리의 외침은 가라한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려준다. 그는 '산마로'로 거듭나고, 아라를 구하기 위해 찾아 나선다. 아라는 마침내 카라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고 산마로의 기억을 되찾은 가라한과 재회한다. 하지만 그 둘이 서로의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기까지에는 몇 가지 과제가 남아 있다. 그 하나는 그녀가 여전히 스스로에 대해 온전한 자아 정체감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책임과 배려와 존경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체성을 가진 남녀의 대등한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했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한 온전한 정체감의 획득은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세상 어느 여자가 님의 행복 되고 싶지. 님의 짐이 되고픈 가요.
그녀는 자신이 부딪혀야 할 과제로부터 계속해서 뒷걸음질만 치고 있다. 자아의 존재를 확인하는 문제가 주변 인물들과 관계를 맺는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어떻게 해결해 가는가의 문제라면, 바로 이 지점에서 타인과의 관계, 다른 인물들과의 상호작용의 중요성이 제기된다. 즉 자신감 없이 계속 뒷걸음질만 치려 하는 아라를 형압의 부인인 우이가 꾸짖는다. 그리고 옆에는 진실한 사랑과 믿음을 보여주는 가라한 아사 곧 산마로가 있다.
제가 실카 강가의 아라 맞습니다. 제가 미친 듯 불칼을 빚던 그 계집 맞습니다.
용기를 주세요! 제 가슴에 이전보다 더 큰 불씨를 주세요!
가난한 백성 큰마로의 딸…여전히 여기 살아 있는 아라에게…
아라는 다시 자신의 삶의 주체로 일어선다. 두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게 위해서 풀어야 할 또 하나의 과제가 있는데, 바로 해조부인의 존재다.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해조의 존재가 부담스럽고, 한편으로 이 세 사람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서서의 흐름이 자칫 통속적 멜로드라마의 방향으로 흐르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해조가 그녀의 연인 무타를 찾아 돌아가면서,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명쾌하다 못해 싱겁기까지 한 해결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연출이 다소 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감정의 소모전은 빨리 끝낼수록 좋다'는 가라한의 대사에서, 이들의 의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즉 서로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확인만이 이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돌 수 없는 까닭이다. 이들이 온전한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지는 이제 건강한 삶에의 지향으로 나타난다.
나는 이제 혼자 숨어 울던 그 어린아이가 아니다.. 아니기로 했다.
나는 다시…어떤 꿈을 가지기로 했다!
너희가 덜 울어도 되게, 죽임 당하지 않고 예쁘게 살 수 있게. 나도 열심히 애쓸 테니까…
당신이, 그리도 열심히 싸우듯이 나도 나도 내가 제일 잘 살 수 있는 일을…!
가라한은 다시 전장으로 나서고, 아라는 야장소로 돌아가 불칼을 빚기 시작한다. 이름을 되찾고, 서로의 이름을 다시 부르게 된 아라와 산마로의 자아 탐색 여정이 서로 사랑에 대한 확인에서 나아가 보다 넓은 사회로 그 방향을 돌리고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만약 <불의 검>이라는 작품 자체의 정체성을 이야기한다면 바로 이 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수많은 순정만화들이 사랑을 이야기하고 두 남녀가 사랑을 통해서 전체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많은 작품들이 있다. 그 가운데 <불의 검>이 갖는 차별성은 바로 주인공들만이 존재하는 그들만의 세상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지향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이 작품에서는 건강한 삶에의 지향이란 범박하게 말해 '열심히 산다는 것'이며 열심히 살아가면서 하는 행위 하나하나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반드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는 세계관을 볼 수 있다.
<불의 검>은 아직 완간되지 않았고, 따라서 우리의 주인공들도 여전히 자아 탐색의 여정에 있다. 하지만, 미래에 대시 그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그들이 이전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불안함을 느끼고 쉽게 흔들려서 억압적인 이부 세력에 굴복하게 되는 일은 없으리라. 이미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고, 미래는 여러 가지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우연성의 유희에 열려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의 미래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역동적인 삶의 과정 속에서 질서 정연하게 조직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본다.
최아롱(Aring Choi)서울출생.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서강대 국문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만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만화를 공부를 시작한 이후, 만화평론을 시작할 기회를 얻었다. 모든 사회적으로 문화적인 활동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메시지'를 고민하는 어쩔 수 없는 리얼리즘 세대임을 인정하면서, 이와 같은 관심이 만화라는 장르에서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 더 깊이 연구해볼 계획이다.
출처: (주)안그라픽스, 디자인문화비평 05-디자인과 정체성, 2001. 10. 23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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