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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검

누군가 조잡한 과도로 강호의 고수에게 대들었을 때

이번 여름에 추천할 만화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불의 검'은 그 추천작으로 부족함이 없다. 이제 영화계에서는 '비천무'의 작가로 잘 알려진 김혜린(그는 필자의 대선배이시다. 존칭을 쓰지 못함이 죄송스럽다)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영화계에서는 시로오 마사무네라는 만화가가 '공각기동대'의 원작자로 알려져 있지만 마사무네의 깊이를 공각만으로 평할 수 없듯이 비천무만으로 김혜린이란 작가를 평할 수도 없다. 특히나 김혜린이나 마사무네처럼 작품마다 파란만장한 행보를 옮기는 작가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불의 검에 대해 말하기 전에 비천무에 대해 꼭 해야 할 말이 있다. 그것은 '키노'와 관련이 있다.

  얼마전 키노의 웹진인 Nkino에서는 박재환이라는 기자 겸 영화평론가의 영화 비천무에 대한 평론이 실렸다. 문제는 그 글의 상당수가 만화 비천무의 실랄한 평가절하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의 글은 영화 비천무 시사회에서 들려온 안타까운 한숨(아마도 만화를 본 이들의 한숨)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한다. 구영탄만화외엔 인기작을 본적 없다는 그는 '만화가 어떠하길래?'라는 생각으로 만화 비천무를 찾아본다. 그리고 이 만화가 '과대포장된 찬사'를 받고 있다고 느낀다. 논의의 핵심은-대다수의 다른 평자와는 달리-영화 비천무가 허접한 이유는(그는 영화 비천무의 허접함을 당연시 전제한다) 사실은 원작이 허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요리사가 밥을 죽쑨 이유는 쌀이 안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작이 어째서 허접한지에 대해 설명한다.

  1. (만화) 비천무는 무협지와 홍콩영화의 인기라는 '시류에 편승'한 만화다.
  2. 김혜린이 역사의 비전문가임을 감안해서 몇 수 물러주고 봐도 비천무는 역사적으로 너무 무식해서 '내공이 딸린다'.
  3. 비천무는 무협인데도 순정만화의 범주를 못벗어난다.
  4. 무협적 요소도 '어줍잖다'.
  5. 너무 공허한 만화라 예쁜 나비그림과 고시가로 때웠다.
  6. 김용과 비교해서 '조잡'하고 '표피'적이며 문장력이 딸려 '비교할 수 없는 차이'를 낳는다.

  박재환이 '편승', '어줍짢은', '공허' '딸리는 내공', '조잡', '표피적', '허술' 등의 실로 화려한 수식어를 농축시키며 쓴 비난의 진국같은 그 글을 그대로 따르자면 만화 비천무는 참으로 구제불능의 만화다.

  그런데 그의 글에서 만화, 특히나 순정만화에 대한 비하와 선입관을 발견하기란 정말이지 쉽다. 너무 쉬워서 '그게 이게아니라 다른건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그럴만도 하다. 그는 불청객 시리즈 외의 다른 만화를 본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미경험자는 선입견으로만 판단한다는 사실은 문화비평에서 성상식에 이르기까지 무릇 인간사의 보편적 현상이다. 즉 그는 비평가로서 만화비평을 하기엔 '내공이 너무 딸린다'.

  물론 누구나 작품평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평론가로서 공개적 자리에 글을 쓸때는 예외다. 또 영화비평가도 만화비평을 할 수는 있다(그 역도 마찬가지이고). 그러나 그것은 영화비평가가 유난하게 만화역시 좋아해서 내공을 쌓았을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좋다! 나는 TV에서 'ET'를 본 것 외에는 영화를 본 기억이 별로 없는 만화평론가이다. 그러다가 '서편제'를 보았다. 그런데 이게 뭐냐? 임권택은 판소리를 다루게엔 너무 내공이 딸린다. 임권택이 복고와 민족주의의 시류에 편승한 것은 알겠다. 하지만 시간을 채울 능력이 없는지 슬금슬금 판소리로 때워버리는건 어줍잖다.

  자, 필자가 이렇게 나오면 영화를 사랑하는 키노의 독자분들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분노? 멸시? 비웃음? 이지메?  이제 독자분들은 필자의 심정을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한다. 소위 평론가이고 기자라는 자가 '나는 본 것 없다'라는걸 인정하면서 평론을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그는 딸린 내공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즉 만화에 대해 풍부한 식견과 애정을 가진 자라면 도저히 하지않을 짓을 해버린 것이다. 필자가 연기한 '가상의 나'가 어이없는 말을 한것처럼 말이다.

  만화가 김혜린은 '거장'이었던 것이다. 그는 순정만화계에서 존경받는 거장이다. 그래서 만화를 아는 이들은 독자든 평론가든 기본적으로 거장의 예를 취한다. 단점을 논할때도 마찬가지이다. 박재환의 글이 만화인들 사이에 충격으로 다가온 첫 번째 이유는 우리들 중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무례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작년에 여성만화인협의회의 MT에 따라갔던 기억이 난다(참고로 필자는 남자). 김혜린은 필자가 못알아봤을 정도로 조용하고 겸손한,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민초'같은, 그러나 강한 여성이였다. 당대의 젊은 만화가들은 모여 그의 말에 조용히 귀기울였다. 콧대 드높은 만화가들이 자진해서 숙연해진 것은 김혜린이 거장이기 때문이다.

김용을 끌어들여 비교하며 비하한 것은 논할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칙'이기 때문이다. 필자역시 고다르를 끌여들여 박재환의 글을 '허접하고 무식한 평론'이라며 비하할 수 있다.

그런 비난은 너무 쉽다. 지구상에서 한사람만을 남겨두고 다 비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용을 다시 끌여들여 박재환의 글이 '문장이 허접하고 굽이굽이 안친다'라고 할 수도 있지. 그런데 박재환은 반칙에도 불구하고 실수를 저지른다. 그는 순전히 무협지를 기준으로 비천무를 평가한다. 초식이 어쩌무 무공수련과정이 단순 어쩌구 하면서.

  그런데 만화 비천무는 무협지가 아니다. 김혜린이 시류에 편승했다는 주장역시 터지는 웃음을 참기 힘들다. 그녀는 '편승'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므로. 오히려 기존의 순정만화에 무협지의 요소를 끌어들인 그 능력과 도전정신이 빛날 뿐이다. 80년대 후반 비천무의 존재는 이미 많은 발전을 거친 순정만화의 범위를 크게 확장시켰다. 90년대 순정만화가 SF에서 아방가르드를 아우르는 성과를 거둠에 있어 김혜린의 존재는 바위와도 같다. 그녀는 무협지같은 힘을 숭배하는 남성중심적 장르를 순정의 틀 안에 어떻게 녹여낼 수 있는지, 그러면서도 순정의 여성주의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 모범답안을 제시해냈다. 그것이 비천무인 것이다. 그러니 박재환이 '순정의 틀을 못벗어났다'고 비난한 것은 사실 칭찬받아 마땅한 요소인 것이다. 무술 득도의 과정이 왜 길게 들어가야 하나? 왜 비천무가 공포의 외인구단이나 록키가 되어야 하나? 여성에게는 여성의 취향과 관심사가 있는 법이다. 물통들고 통나무 위를 뛰는 장면은 남성의 관심사일 뿐이다.

비천무는 무협지를 차용하면서도 힘을 숭배하고 가부장적 권위를 주장하지 않는 놀라운 면모를 보여준다. 오히려 '이기는 것으로 결정한다면 강한자가 모든 걸 가진다는 주장이 아니냐?'며 질문한다. 그리고 강한 힘들과 폭력, 무림의 고수들 사이사이에 민초와 여성, 소수민족의 한과 극복의 의지를 우려낸다. 당시 지명 따위보다 우선하는 이 역사의식이야말로 우리가 김혜린의 만화들이 무엇보다 소중한 이유인 것이다.

  만화 비천무는  혈통과 힘을 가졌음에도 민초와 소수민족에게 영혼을 회귀하는 진하와 자의식과 힘, 의지를 가지고 남자와 그들 중심의 역사를 거부하며 살아간 여성 셜리를 주인공으로 권력과 욕심에 희생당한 자들을 찾아 함께하는 만화이다. 그리고 그 역사의식 한편에 끊임없이 사랑의 힘과 갈증을 노래한다. 사랑의 노래가 역사성의 상실로 이어지는 것이 상식인데도 비천무는 두 마리 귀한 토끼를 한번에 잡아내는 것이다. 거장의 걸작이기에 10년이 지난 지금도 보는이의 신금을 울린다.

  그런데 박재환은 영화 비천무가 허접한 것이 원작의 허접함 때문이란다. 더 나아가 그는 역사지식도 별로고 문장도 내용도 허접해서 원작에서는 멜로적 요소만을 건져냈을 뿐이라고 한다. 원작의 고귀한 역사성이 사라진 것이 건질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라. 가부장적이고 힘을 숭배하는 무협으로 복귀한 것이 원작에서 건질게 없었기 때문이라. 피땀흘려 키워낸 은빛나는 소중한 쌀로 떡밥을 만든 것이 쌀 때문이라....

그런 주장을 한다면 박재환은 치졸한 인간이다. 박재환 당신은 참으로 치졸한 인간이다. 강호의 예를 모르는 자다. 자신이 외친 미덕을 그대로 실천하는 김혜린 같은 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졸부다. 자신이 사나이라면 강호의 대고수에게 백배 사죄하고 활복하든지 하라. 그리고 그 치사한 평가절하와 떠넘기기를, 부디 그걸 영화사랑이라고 외치지 말기 바란다.
사랑은 그러기엔 너무 고귀한 것이다.

(여러분 불의검 꼭 보시길)

2000년 글
이 글은 키노의 2000년 여름특집으로 만화소개를 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글이다. 필자는 키노 웹진의 기사에 매우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의검을 소개하겠다고 하고는 이 글을 썼다. 하지만 실리지 않았는데 키노측은 '여름특집에 어울리지 않는 글' , '웹진 키노에 대한 것으로 출판물 키노에 적절하지 않는 글', '특집으로 김혜린 인터뷰가 실려 이것이 원하는 작품옹호를 대신하는 기능을 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새로운 글을 청탁하였으며 대신 위의 글은 웹진 Nkino에 적절한 대우로 게재하겠다고 제안했다. 필자는 여기에 수긍하였고 새 글을 썼으며 그것이 키노에 발표되었지만 웹진에 전글이 게재되었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자신을 비난하는 글을 스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놀라운 지성이며 그러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필자는 키노를 비난할 생각은 없으며 오히려 일단 게재를 약속했던 키노 편집부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글이 사라지는것도 원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 글은 부당하고 옹졸한 비난에 항거하는 글이다.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도 그렇고... 빌려간다음 무시하지 말았으면 한다.

- *키노컬럼200007*    written by 박무직

퍼온 곳   ☞   http://kirime.x-y.net/talk/column/column_1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