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제가 김혜린입니다.” 6번째 통화 시도 끝에 겨우 마주한 그녀의 목소리. 물정 모르는 사람들은 대개 그녀의 첫인상에 기가 죽는다고 했다. 날카로운 이목구비와 ‘전투적’으로 느껴지는 괄괄한 목소리가 흔히 여성만화가에 갖는 나긋나긋한 고정관념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탓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그녀를 깊이 만나면 이런 편견들이 얼마나 얕은 생각인지 쉽게 깨닫게 된다. 채 160cm가 안되는 자그마한 체구에 쑥스러움을 잘 타는 그녀는 아직도 소녀 같은 감성이 묻어난다. 더군다나 마흔이 넘은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세상의 이치에 둔감한 모습이 겉으로는 한없이 단단해보여도 천상 여자임을 실감케 한다.
잡지 폐간으로 몇 차례 연재가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불의 검’이 얼마 전 애장판 타이틀을 걸고 새로 태어났다. ‘불의 검’은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시절, 만주벌판 아무르강 유역을 살아가는 아무르와 카르마키라는 두 종족간의 대립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남녀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을 담은 김혜린의 대표작이다. 만화책이라기보다는 백과사전에 가까운 묵직한 모습으로 거듭난 양장본 ‘불의 검’은 다사다난했던 지난 10년을 한 몸에 품고 있는 듯하다.
비운의 걸작이 다시 빛을 본 것에 대한 소감을 묻자 그녀는 ‘이게 비운이라면 행운은 어떤 것일까요?’라고 반문한다. 대신 나름의 이해도 얻고 격려도 많이 받았으니 주위 사람들에게 고마울 뿐이라고 느낌을 대신했다.
과거의 명작을 곱게 묶어 다시 양장판으로 펴내는 건 끝없는 ‘기근’에 시달리는 요즘 만화계의 돌파구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아직 연재가 끝나지도 않은 작품의 옷을 서둘러 갈아입혀 내놓은 심정이 편하지만은 않을 터. ‘김혜린이 돈에 눈이 멀었다’ ‘독자들을 우롱하는 처사다’라며 분개하는 팬들 목소리를 모를리 없는 그녀의 요즘 심정은 그래서 더없이 복잡다단하다.
“자신의 작품이 좋은 치장을 하고 세상에 거듭 나온다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이죠. 그렇지만 출판사에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많이 망설인 게 사실입니다. 만화 시장이 여전히 좋지 않은 상황에서 언제까지 작가로서 자존심만 세울 수는 없잖아요?”
그녀는 늘 그런 식이다. 사실 만화가 입장에서 애장판을 내는 건 두 손 들어 반길 일. 힘 한 번 들이지 않고 인지세를 벌 수 있으니 기피할 이유가 없다. 대다수 만화가들이 출판사에서 청탁이 들어올 경우 99% 찬성한다지만 그녀는 달랐다. 미루고 미루다가 어쩔 수 없이 설복당한 건 어려울 때 힘이 되어준 출판사의 청 때문이었다.
고백하건대 ‘불의 검’을 비롯한 그녀의 만화들을 처음 접한 건 불과 얼마전이다. 어려서부터 만화보기를 즐겼던 덕에 일찍이 이름난 작가들의 작품을 섭렵했건만, 여전히 김혜린의 작품들이 미개척 불모지로 남았던 이유는 단순하다. 대다수 남성들이 그렇듯 순정만화 코너는 일종의 성역과도 같은 곳이었고, 닭살스러운 그림들이 가득한 책장을 넘기는 게 무척 ‘×팔린’ 일이라는 근거없는 믿음 때문이었다. 단지 여성이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작품이 ‘순정만화’ 진열대에 오르는 현실만큼이나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그러나 만화를 자주 접하지 않는 사람들에조차도 그녀의 작품은 꽤 익숙하다. ‘북해의 별’ ‘비천무’ ‘테르미도르’ ‘아라크노아’ 그리고 ‘불의 검’에 이르기까지 만화가 김혜린이 보여주는 그림들은 여느 여성 만화가들과는 다른 궤적을 따라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만화가 허구와 과장이 바탕을 이룬 매체임을 전제한다면, 솔직히 그녀의 작품들은 단촐하다 못해 심심하다. ‘역사’ ‘서사’ ‘대하’ ‘혁명’ 같이 만화를 관통하는 무거운 주제부터가 만화라기보다는 장편소설에 가깝다. 신체 비율을 무시한 조각같은 몸, 보석을 박아놓은 듯 반짝거리는 눈, 영화같은 대사로 무장한 순정만화의 고정된 틀에 맞춰본다면 그 차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그래서 어떤 만화평론가는 그녀를 가리켜 ‘캔디 콤플렉스에서 탈출한 유일한 여성 만화가’ 라고까지 칭했던가.
“서사적인 내용을 자주 다루는 건 일종의 취향입니다. 나무에 끌리는 사람이 있고,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이가 있듯 저는 그런 것이 마음에 닿습니다. 머리에서 김이 나고, 애증이 교차하고 그런 것에 더 매력을 느끼는 건 천성이 아닐까요.” 요즘처럼 말초적인 느낌이 판을 치는 시대에 단순한 재미 이상의 역사의식과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감추지 않는 ‘김혜린표 만화’는 그래서 더욱 값지게 다가선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그녀는 ‘불의 검’이 아직 현재진행형임을 강조했다. 원래 11월 중 12권을 완간하기로 예정되어 있지만, 평소 습관에 비춰볼 때 ‘희망사항’이 될 공산이 크다.
“많은 사람들이 결론이 어떻게 날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사실 대단한 반전이나 대파국(?) 같은 것은 없어요. 무대를 열어둔 채로 마침표를 찍고 싶은 소망입니다.”
김혜린은 아라와 산마로, 두 주인공에 대한 다음 행보도 잠시 유보했다. 다만 분명한 건 남자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아라는? 기자의 짓궂은 독촉에 그녀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윤신철 기자
believer17@mk.co.kr
시티라이프 2002년 11월 08일 (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