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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칼을 싹 밀었습니다 : 오랜만에 쓰는 글

여러분, 에 이완느케야.(: 북해도北海道의 원주민인 아이누 - 야운쿠르 - 족의 말로 '안녕하세요?'라는 뜻) 정말 오랜만에(!) 여러분을 찾아뵙는 '불량(?) 독자' 돌베개입니다.(사실은, 작품을 구상하느라고, 일에 들볶이느라고, 인터넷에 원고를 연재하느라고 그동안 이곳에 오지 못했답니다. 용서를 -_-;::) 오늘은 오랜만에(!) 신변잡기적인 글을 적으려고요.

한 달 전에 머리를 깨끗이 밀었습니다.(그러니까 빡빡머리가 되었죠) 지금은 머리칼이 꽤(?) 자라서 머리가 '밤송이'가 다 됐죠(제 고참은 저더러 "고슴도치"같답니다 -_-).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머리를 이렇게 '시원하고 깨끗하게' 깎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왜 그랬는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궁금하시면 계속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석 달 전, 제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어느 만화가와 그분의 부인이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해 9월에 부인이 유산(:사산死産)하셨다는 이야기였어요. 그분은 그 때문에 충격을 받아 신문에 싣던 만화도 그만 그리시고 한동안 앓아 누우셨죠. 사실을 알게 된 팬들이 수백 통씩 격려 편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 위로해주셔서 겨우 다시 일어나셨데요.

문제는 제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았다는 거죠.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지금 위로해봤자 - "이미 나은 상처에 약을 바르는 일"이고, 그러면 "상처가 낫기는 커녕 오히려 덧나게 되"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 이 일을 뒤늦게 안, 그리고 두 분을 도와드리지 못하고 함께 슬퍼하지 못한 - 제 스스로가 아주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어요. 남몰래 몇 번이나 눈물을 삼켰고 '죽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렸죠.(절망에 빠질 수 있는 데까지 빠져서 살았어요) 악마가 내 곁에서 '죽어. 네가 왜 살아야 하는데? 이 세상엔 절망만 춤추지 희망은 온데간데 없어!'라고 속삭이는 기분이었습니다. ...참기 힘들었어요.(한숨)

하지만 그럴 때마다 - 제 약속(:다루 같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한다는)과 해야 할 일(:청탁받은 원고)이 떠올라서 - 겨우겨우 자살 충동을 억눌렀고, 그 와중에서도 '비록 늦었지만, 뭔가 해야 한다. 나는 두 분을 도와드리지 못하고 비극을 뒤늦게 안 죄를 지었으니 지금이라도 죄를 값아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럼 어떻게 죄를 값아야 할까? 말로만 "안됐습니다."라고 할 순 없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뭔가를 보여줘야 해.'라고 생각했죠. 얼마 동안 곰곰히 생각하다가 '그래, 그러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뭔가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뭐냐고요? 머리칼을 박박 깎아버리는 일이었어요. '나는 죄인이니 내 머리칼을 싹 깎아서 내가 뉘우치고 있음을 보여주자.'고 생각했죠. 그래도 머리를 깎는 게 눈치가 보이는 일인지라(부모님은 제가 '적당히' 머리칼을 기르고, '보기좋게'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셔서요) 마음만 먹었지 실천하진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기회가 온 겁니다. 한 달 전에 부모님이 며칠 동안 집을 비우시면서 여행을 다녀오셨거든요.("머리칼이 기니 '보기 좋게' 잘라라."라는 잔소리를 남기고!) 저는 '이때다!'라고 생각하고 점심시간을 틈타 동사무소 근처의 미용실에 갔죠. '이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가다듬었어요. 그곳에 가서 "머리칼을 싹 밀어주세요."라고 말하고 ... 정말 '빡빡머리'이다 못해 '민둥머리'가 되었습니다.

참 기분이 묘하데요. '아, 나는 약속을 지켰다! 나는 '행동'했다!'는 뿌듯한 마음과, '어, 이게 내 모습이었나? 나도 처음 보는 이상한 얼굴이네...'라는 마음이 동시에(!) 떠올랐으니까..아뭏든 기분이 좋았고 머리가 시원했어요. 절 따라간 고참은 제가 정말로 깎을 줄은 몰랐는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죠. "야, 너 집에서 뭐라고 안하냐?"고 물었으니까..

저는 태연한 얼굴로 "까짓 거 욕하면 욕 먹죠. 제 입으로 한 말(머리 깎기 전에 동사무소에 '머리 깎고 온다.'고 말하고 갔거든요)이니 지켜야 하는데요, 뭐."라고 말해줬습니다.
:-)

..참 이상하죠. 머리칼을 잃었는데 마음은 (깎기 전보다) 훨씬 편하더라구요. 뭐랄까. 뒤늦게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오히려 마음편해 하는 죄인의 심정이랄까요.(웃음) '아, 나도 이제 그 분들의 [짐]을 지고 내 [죄값]을 치를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기뻤어요.(물론 여행하고 돌아오신 부모님 - 특히 어머니 - 은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하셨지만, 전 개의치 않고 그냥 '깎고 싶어서 깎았어요.'라고 대답했답니다) '민둥머리'가 된 모습을 고이(!) 간직하려고 사진까지 찍었죠.(만약 보고 싶으시다면, 다음 모임에서 꼭 갖고 나와서 보여드릴게요)

.. 그런데, 그런데요.. 전 끝내(!) 이 사실을 두 분(위에서 말씀드린 만화가 부부)에게 말씀드리지 못했어요(두 분의 소식을 듣고 슬퍼했다는 사실도,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사실도, 죄를 값고 싶어서 일부러 머리칼을 다 밀어버리고 마음을 다스렸다는 사실도, 두 분의 마음 속에 '슬픔' 대신 '새로운 기쁨'이 들어서기를 빌었다는 사실도, 어느 한 가지도 털어놓지 못했죠). 1주일 전에는 그 분들을 직접(!) 뵈었는데도 말이예요.

선생님(:그 만화가)께서 "아니, 머리칼은 왜 밀었어요?"라고 물으실 때, 전 끝내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멋쩍게 웃으면서.. "그냥.. 제가 아는 어떤 사람에게 '죄'를 지었거든요. 말로만 잘못을 빌긴 싫어서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머리를 깎었어요."라고 둘러댔죠. 전 나쁜 놈이예요.

....요즘은 '다행히도' 그 '죄'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답니다. 두 분이 다시 새 아기를 배셨고(이틀 전에 알았어요) 저는 처음에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다가, 어느 팬에게서 전해 듣고 나서야 받아들였거든요.(쓴웃음)

.....참 이상하죠. '삶'은 묘해요. 끝간 데까지 절망하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다시 갑자기(!) 희망이 비치는 곳에 들어서기도 하니까요. 두 분이, 그리고 제가 겪은 이 일이 그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죠.(잔잔한 웃음) 새로운 임신 소식을 들은 뒤에야 죄책감(과 우울함)에서 벗어나 조금씩 희망을 품기 시작했으니까요.

...지금 저는, (밤송이처럼 자란) 짧은 머리칼을 보고 웃으면서 '이번에 두 분을 뵈러 갈 땐 어떤 선물을 할까?'를 고민하고 있답니다.(웃음)...이젠 다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고,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열 달 뒤에, 이 사실을 수줍게 털어놓으면 두 분이 저를 용서하실까요? 모르겠습니다. 영원히 입을 다물 순 없으니, 언젠가는 털어놔야겠죠.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다)

- 절망하다가 희망을 되찾은, 다시 날아 오르려고 하는 돌멩이

(덧붙임 : 다루를 보며, 두 분이 배셨다는 그 아기가 떠오릅니다... 아니 어쩌면 그 아기는 아라부인이 밴 둘째 아기인지도 모르겠네요)

크레몬

[2002/10/02]

돌베개님 오랜만이네요^^ 돌베개님이 善을 행하지 못하였음에 느끼신 죄책감의 반만큼이라도 이 세상의 악행자들이 느낄수 있게 된담 얼마나 좋을까요 힘내셔요 돌베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