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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시: 2000/06/08 오후 2:16
게시자: 아브락싸스
제목: 순정역사물의 귀재, 김혜린을 아시는지

퍼온곳: 씨네 21(98/04/13)

심심한데 프랑스역사나
2편의 고전, 김혜린 '북해의 별' '테르미도르'

때는 프랑스 절대왕정시대. 호화롭고 아름다운 왕실과 귀족사회를 배경으
로 삼고 무시무시한 유배지와 지하밀실을 슬쩍 비춰보인다. 무사들의 용맹
과 의리, 충성서약과 배신, 음모와 추적 등을 줄거리로 세우되 비밀스럽고
애절한 로맨스도 함께 엮어낸다. 흥미진진하고 꽤 그럴듯한 순정만화 한편
에 대한 설명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건 만화가 아니라 영화 얘기다. 얼마
전 개봉해 조용히 상영중인 '아이언 마스크'가 바로 그 작품이다.

정치기구를 개편하고 왕권강화와 국력증대에 힘쓴 루이 13세를 도와 절대왕
정의 틀을 안정시킨 삼총사의 시대는 지나가고, 때는 다음 세대로 넘어간
루이 14세 집권기. 포악하고 잔인한 어린 왕 루이 14세에 대한 백성들의 원
성이 자자한데, 옛 총사들마저도 왕에게 등을 돌리고 오로지 달타냥만이 외
로운 충성을 바친다. 마침내 왕을 갈아치우기로 결심한 삼총사들은 철가면
이 씌워진 채 유배지에 갇혀있는 루이 14세의 쌍둥이 동생을 찾아내 역모
를 꾸민다. 총사들의 의리와 갈등, 왕비와 달타냥 사이의 숨겨진 로맨스,
비밀 속에 살아온 쌍둥이 왕자 등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왕실과 감옥을 오
가며 펼쳐지는 것을 보노라면, 산뜻하게 잘 만들어진 옛 순정만화 한편을
보는 듯한 즐거움이 느껴진다(총사들이 대거 등장하면서도 이렇다 할 액션
이 없는 점, 왕과 총사들의 용모가 상당히 준수하다는 점 등도 매우 순정만
화적이다).

순정역사물의 귀재, 김혜린을 아시는지

하지만 매끈하게 잘 만들어진 이야기에 볼거리가 아기자기하면서도 뭔가
김새는 듯 허술해 보인다는 것이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의 느낌이라고 한
다. 혹자는 지난 가을부터 시작된 디카프리오 공세에 관객들이 이미 식상
할 대로 식상해서라고 흥행부진의 이유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주 관객층
이 20대 젊은 여성들인 점을 보면, 진짜 이유는 어쩜 따로 있을지 모른다.
즉, 관객들은 이 비슷한 시대 비슷한 무대를 배경으로 한 너무도 뛰어난 만
화 두편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17, 18세기 프랑스는 격동기라는 역사적 배경과 아기자기한 묘사거리, 화려
한 문화 때문에 한국과 일본 순정만화의 인기있는 소재가 돼왔다. 절대빈곤
과 극에 이른 사치가 병존하고 교양과 문맹이 양립하며 온갖 근대적인 것들
이 태동하던 이 시기는 박진감 있는 이야기 무대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를 배경으로 한 일본만화 중 한국에도 소개된 것으로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있다. 발매 당시 왕의 친위병 오스칼과 그 친구 앙드레를 최고 인
기스타로 올려놨던 이 작품은 앙트와네트 왕비가 백성들을 똑바로 바라보
며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는 장면으로 끝맺어지는데, 주로 왕실과 귀족의 시
각으로 서술됐으며 역사적 사건보다는 왕실 로맨스가 주요 이야기축을 이룬
다는 점이 특징이다.

하지만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정말 인상적인 작품들은 한국산들이다. 슬쩍
슬쩍 분위기만 따온 만화들까지 거론하자면 꽤 많지만, 이중 그럴듯한 상황
설정을 갖춘 작품들을 꼽는다면 '테르미도르'와 '북해의 별'을 들 수 있
다. 흥미진진한 재미를 뛰어 넘어 어떤 품격마저 갖춘 이 작품들은 공교롭
게도 같은 작가의 것이다. 순정역사물에서 큰 족적을 남긴 만화가 김혜린
이 이 두작품의 산파다.

아마도 한국 순정만화 사상 가장 위대한 데뷔작으로 불릴 수 있을 83년
작 '북해의 별'은 18세기 프랑스 주변부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북해와 발
트해에 면해 있는 해상왕국 보드니아를 배경으로, 부패한 왕실과 귀족사
회, 그리고 이에 맞서는 민중의 봉기가 큰 줄거리다. 당당하고 아름다운 심
성의 무사 유리핀 멤피스 후작이 겪는 음모와 시련, 그리고 그 주위에 몰려
드는 진보적 지식인, 농민, 군인, 떠돌이 등의 사연과 활약을 역사적 사실
과 허구, 야사 등을 적절히 섞어 그린다. 이들이 지켜가는 각자의 애틋한
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 한때 운동권 학생들의 학습자료로도 쓰였다는 이
책은 장대한 서사, 인간심리의 이면과 광기에 대한 이해, 아름다운 가치들
의 옹호, 끝까지 의연한 작가의 시선 등으로 인해 발매 당시 큰 인기를 누
렸을 뿐 아니라 지금도 스테디셀러로 자리잡고 있다. 프린스에서 대본소용
으로 찍어낸 것을 팀매니아에서 서점용 전 11권으로 다시 냈다.

만화로 읽는 프랑스혁명사 '테르미도르'

한편, '테르미도르'는 프랑스대혁명 시기를 본격적으로 그린 작품. 로베스
피에르 등 프랑스 혁명의 주역들이 처형되는 테르미도르 9일의 반동을 시대
적 배경으로 삼아 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감긴 다양한 인간군상들
을 그린다. 분노와 증오로 혁명에 뛰어들었지만 길 잃은 혁명의 발굽에 스
러져가는 평민, 혁명의 대의는 받아들이지만 그칠 줄 모르는 희생에 고통스
러워하는 귀족, 그리고 시대의 역류 속에 괴로움 당하는 사랑 등이 주된 이
야기다. 남부 프랑스의 귀족이자 연인인 알뤼느와 줄르는 붉은 스카프 대원
들에 의해 이별을 맞는다. 알뤼느는 줄르가 죽은 줄 알고 복수하기 위해 붉
은 스카프 대장 유제니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알뤼느는 피와 혼란으로 얼
룩진 파리코뮌 거리에서 힘겹게 연명하는 유제니 가족들을 보고 연민을 느
끼며 얼마 안 있어 유제니를 사랑하게 된다. 당시는 지롱드, 산악파, 왕당
파 등 여러 정치세력들이 제각기 세력다툼을 벌이던 혼돈기. 그 와중에 로
베스피에르 등 혁명의 3거두가 죽어간다. 극심한 혼란과 회의를 느낀 유제
니는 알뤼느를 돕다가 죽음을 맞는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엮어 내는 김혜린의 서사력은 '테르미도르'에
서 무르익고, 그래서 이 작품은 심지어는 프랑스혁명사 역사책 대용으로 읽
혀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테르미도르'는 도서출판 서화에서 91년도에 전
4권으로 묶여 나왔다.

'아이언 마스크'를 보고 “재미는 있는데 좀 싱겁다”고 느낀다면 오랜만
에 이 묵은 만화들을 다시 들춰봄 직하다. 이 복잡한 시기의 복잡한 이야기
를 쓰고 그리고 연출한 작가의 능력을 새삼 탄복하게 만듦과 동시에 박진
감 넘치면서도 오밀조밀한 재미를 맛보게 하는데, 여기에 또 보너스가 붙는
다. '북해의 별'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 순정만화의 표현기법과
그림체를 다시 돌아보는 재미도 만만치않기 때문이다.

오은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