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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로 산다는 것
: 만화, 어쩌다가 너랑 같이 살게 되었을까

세상에는 사람도 참 많고, 그 많은 사람들이 또 제가끔 무언가를 하며 살아간다. 그래 간혹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저 사람은 어떻게 해서 지금 저 일을 하게 된 것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자주 묻는 질문 하나를 이해할 수도 있다. “만화가가 된 동기가 뭡니까?”라는 재미없고 진부하고 답하기 애매한 질문. “만화가 하고 싶어서”라고 나 역시 재미없는 답변으로 슬몃 때우곤 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본들 만화를 하게 된 결정적이거나 감동적인 동기 같은 건 내겐 없었으니까. 그럼 왜 만화가 하고 싶었던가? 만화 그리는게 좋으니까다. 역시 너무 시시하고 뻔한 답일까?

사람의 기억이란 활동 사진보다는 스냅 사진 쪽에 가까운 형태로 저장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억의 실타래들은 툭툭 끊어지곤 하는데, 마치 어떤 것은 흐린 흑백 사진처럼 어떤 것은 무성 영화의 몇 장면처럼 떠오르곤 한다. 어린 날이나 젊은 날을 일종의 감상과 덧칠 없이 초연히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담담히 반추해보려고 해도 여전히 그것은 조금은 애수를 동반한 채 슬그머니 다가오곤 하는 것이다. 그 기억의 도서관을 천천히 더듬어 올라가보아도 언제부터 만화를 보기 시작했고 언제부터 만화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는지는 참 묘연하다.

제법 선명한 기억의 시작은 초등학교 3-4학년 무렵부터랄까. 글짓기란 걸 했었는데, 조금 글재주가 있었던지 혹은 거짓말 재주가 있었던지 더러 상도 받곤 했다. 하지만 그건 학교에서의 일이었고, 내가 혼자 있을 때 주로 한 것은 이른바 낙서와 책읽기였다. 아직 집안에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이었고 영화라곤 일년에 한두 편 볼까말까 할 때였으니, 아무래도 내 상상력에 가장 많은 자극을 준 것은 손에 얻어 걸리는 대로 읽었던 이런저런 책들과 만화책들, 그리고 내가 자랐던 환경들 그 자체였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아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자라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에 나는 정말 동의한다.

물론 내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느끼며 자란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럴 리가 없고, 사실상 그건 그다지 바람직하지도 않을테니까. 아무튼 모든 책들은 재미있었고 만화 그림 그리기도 재미있었다. 이야기를 지어내서 글짓기를 하는 것도 재미있었다.(글짓기 대회란 건 글게? 마냥 재미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글짓기 대회와 관련해서 한 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상처에 관한 오래된 기억이다. 어린 날, 어느 글짓기 대회 예선에선가 나는 좀 저조했고 내 친구가 본선 참가 자격을 땄는데, 내가 그 친구의 이름표를 달고 대신해서 본선에 나갔던 적이 있다. 친구가 아파서도 아니었고 내가 어거지로 원해서도 아니었다. 평소 내가 항상 학교에 상을 더 가져왔기 때문에 나를 내보낸 것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그 친구한테는 무슨 말로 나의 대리 출전을 설명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다지 납득할 만한 설명을 못 들었던 걸 보면 그 친구도 그저, 대강, 그리하기로 했으니 그런 줄 알아라 정도만 들었겠지.

거절하거나 항의해보기엔 우린 너무 어렸다. 하지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정도는 알 만큼 어렸다. 학교는 상(혹은 점수)을 원했고, 상을 가져올 확률이 보다 높다고 생각되는 아이르 대신 내보낸 것일 뿐 사실 누구라도 상관없었던게 아닐까. 내어주는 종이 위에 제목을 적고 학교와 친구의 이름을 적으면서 통증 비슷한 걸 느꼈었다. 그 대회의 제목도 결과도 기억에 없고, 그저 남의 이름을 달고 혹시 누가 알아챌까 내내 두근거렸으며 이후에도 그 일에 관해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기억만이 선명하다. 그건 두 소녀를 다치게 한 일이었고, 아마 선생님도 좀 다쳤으리라. 내게 그런 지시를 해야 했던 선생님의 그 어정쩡하고 어색한 표정. 지금은 부디 자유롭고 평안한 노후를 보내고 계시기를.

어쨌거나, 내 생각과 내 느낌 내 상상을 표현한다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고 그것은 글이든 그림이든 한가지였다. 대개 자라면서 어느 정도는 저런 시기를 거치겠지만,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유난히 자신의 그런 놀이에 파고들었다. 쥐꼬리만한 재능이란게 있었던 모양이고, 거창하게 말하면 일종의 천형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개인적 놀이는 중고교를 거치면서도 내내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고3시절에 극에 달했다. 누구라도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은 그때, 나는 어쩌면 나의 유희안으로 달아났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얼치기로 고3을 보내고도 어찌어찌 한 대학에 입학은 했었지만, 입학하고 처음 한 짓이 신입생 환영회 과자 봉지에 머리통 그리고 강의실 책상마다 낙서 범벅을 만들어놓는 거였다. 결국, 나는 진짜 하고픈걸 하겠다고 결심했고, 그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 편지로 알게 된 선배 작가 분을 만나러 난생 처음 서울행 기차를 타던 날, 달랑 머리를 묶었던게 기억난다. 일자리 찾아 상격한 시골 소녀처럼 어정쩡하게 서울역 앞에 서 있던 그날, 내가 겁을 좀 집어먹고 있었던가, 아닌가......

‘북해의 별’이란 만화가 나의 데뷔작이었다. 운이 좋았던 것이지 요즘 같으면 그 그림 솜씨론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을 것이다. 모르니까 용감하다는 말은 과연 그 당시 나한테 해당된다. 얼마만한 분량이 될지 얼마만한 시간이 걸릴지 잘 몰랐고, 열심히 한 십 년쯤 하다보면 나 자신의 세계가 생길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만 가지고 있었다. 왜 설익은 젊음과 서투른 재주로 ‘혁명’이 뒤섞이는 이야기를 그리게 됐는지 내가 중언부언하기란 참 난처한 일인데, 돌이켜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나는 흔히 일컫는 386세대(물론 이 말의 함의에 싸잡히긴 싫지만)인데, 이걸 좀 장황하게 풀자면, 잘살아보세와 새마을과 유신시절과 10/26과 서울의 봄과 광주와 조찬 기도회 등등을 다 바라보며 자란 세대란 얘기도 할 것이다. 물론 거기엔 나쁜 것뿐 아니라 좋은 것들도 다 포함되어 있다. 앞서 적었듯 누구나 자신의 유년과 청춘엔 자신만의 음악이 흐르는 법. 게다가 밥상머리에서 벌어지는 다툼질이란 게 돈타령도 아니요 자식 공부 타령도 아닌, 참으로 거국적인(?)-결국엔 밥상이 날아가고 낑낑대는 아버지의 모난 어깨와 훌쩍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심심찮게 바라보며 자라야 했던 게 내게 무슨 영향을 주긴 주었겠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해놓고 나면 뭔가 갈비뼈 어디쯤이 아주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솔직하게 표현하자. 나는 그저 사춘기 소녀 같은 마음으로 꿈을 꾸기 시작했던 거다.

세상 일 중에 만만하고 손쉬운 직업은 없다는 게 내 생각인데 만화가도 그런 하 많은 직업들 중의 하나다. 물론 적응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원래도 혼자 딴 짓 하는데 이골이 나 있었으니까, 작업 컨디션에 따른 불규칙한 생활도 책상에 머리만 죽어라 박고 있는 일도 그다지 낯선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작업 자체에서 오는 괴로움 같은건 어찌할 여지가 없었다. 머릿속에 마음속에 아무리 그럴싸한 것이 가득 차 있더라도, 그것이 일단 형태를 띠기 시작하면 일말의 좌절을 맛보지 않을 작가가 몇이나 될까? 아무리 골방에 처박혀 백지를 노려보며 혼자 나날을 보내는 사람이라도 모든 것에서 그야말로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있기는 있을까?

내게 행운이란 것이 있다면, 가족이 나의 엉뚱한 반란을 비교적 잘 이해해주었다는 것과 가족의 생계를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짐이 무거운 이들도 있었으니), 그리고 지방 소도시에서 나 홀로 내 세계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뿐만 아니라 당시 거의 비슷하게 작품 활동을 시작한 나의 동료들도, 가지고 있는 건 젊음뿐이었다. 이른바 세상에서 순정 만화라 일컫는 어떤 꿈을 그려내고 있던 우리들은 외딴 섬 같았고 그만큼 외로웠고 그런만큼 자유로웠다. 물론 그저 내 생각일 뿐, 이런 부분에 관해 그네들에게 물어본 적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소는 외딴섬 같은 존재이고,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며, 시집을 내지 못한 시인이라는, 어줍잖은 생각 또한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유별을 떨 필요도 없는 거니까.

첫 월급을 받은 아이들이 대게 그렇게 하듯 나도 첫 원고료로 어머니께 속옷을 사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화집을 샀는데, 어느 인상파 화가의 그림 구도에 반해서 흉내내보려고 끙끙대던 기억도 난다. 뭐든지 첫경험은 소중한 법인가보다. 즉 나는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던것이고 비록 그것이 아주 미약하고 적은 것이었을지라도 내게는 자립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북해의 별’을 마치는데 5년이 걸렸는데, 그동안 만화책으로만 보던 선배분들을 만나뵐 기회도 있었고, 가끔 공짜 술도 얻어먹었고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얻어들었다. 만남이래 봐야 지방살던 나로서는 일 년에 한두 번 때로는 이삼 년에 한 번인 경우도 있었지만 참 왜 그렇게도 고생들을 하셔야 했는지! 그럼에도 천진난만하게 넉넉하게 웃으시는 분들이 많았는지! 더욱 유감인 것은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고생하는 선후배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요, 그때 한숨 나오게 하던 출판의 유통 구조며 문제점들도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이다. 하긴 그래도 상당히 달라진 부분도 있긴 있다.

예를 들자면 심의 문제가 그것인데-물론 심의란 것 자체는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고 여전히 표현의 자유 문제는 남아 있지만-별 시답잖은 트집을 잡아 원고에다 바로 푸른 색연필로 죽죽 그어가며 수정이니 삭제니 일방적인 통고를 하는 문서가 날라오곤 하던 게 1980년대 중반까지의 만화 심의였다. “4월에 웬 눈일까?”란 대사가 왜 걸렸는지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데, 그걸 “이 계절에 웬 눈일까?”로 바꾸어 놓었더니 통과가 되던, 아무튼 그런 웃기는 옛날 이야기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처음 키스신이 나와서 전국이 뒤집어지고 어떤 남자 가수가 처음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불러 또 한번 뒤집어지곤 하던 시절의 연장선상이었으니까. 그 꽉 막히고 거의 유치한 수준이던 심의실의 태도가 좀 바뀐 게 내 기억이 맞다면 6/29선언 후부터였다.
나는 그때 후속작인 ‘비천무’ 첫 권을 그리고 있었는데, 묘하게도 2장 속표지를 6월 10일날 그렸다는 기억이 뚜렷이 남아 있다. 그날 연기 메케한 부산 시내로 나가긴 했었는데, 대체 시내 나가기 전이었는지, 헐레벌떡 돌아온 다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한참 나중에 원고를 완성해 심의에 들어갔는데, 어라? 생전 처음으로 푸른 줄 하나 없이 무사통과가 되었다. 심의 기준이 바뀌었다는 풍문은 전해들었지만 심의실에다 대고 캐물어본 것도 아니고 다른 작가들 경우는 또 어떤지 일일이 확인한 바도 없지만, 어쨌든 그후로 나는 내 원고 위에서 그 비참한 푸른 줄을 보지 않았다.
적어도 내겐 있어서 민주화의 첫 실감이란 그런 것이었다. 너무 개인적이고 쪼잔한가? 자신의 그림을 도려내거나 덧씌우고, 머리 빠개지게 궁리해서 적었던 대사들을 갈아치워야 하는 일이, 심지어는 통체로 한 부분을 덜어내거나 아예 궤도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 일이, 작가란 족속에게 대체 어떤 의미였겠는가. 푸른 줄이 없어지니 아주 기분 좋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6/10과 6/29가 가져온 변화 중 하나라고 생각했고, 용감한 사람들에게 속으로 아주 감사했다. 비록 그 변혁이 불완전하고, 시작에 불과한 일이었을지라도.

이윽고 올림픽을 건너 만화 잡지 시대가 열렸다. 단행본과 잡지는 각각의 장단점이 있는데, 단행본이 작품의 연속성과 호흡을 유지하는데 더 유리하다면 잡지 쪽은 즉각적인 소비자의 반응속에 작업의 긴장감과 순발력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더구나 단편이나 중편 만화는 잡지라는 매체가 없다면 발표자체가 거의 불가능한게 현실이고 보면 다양한 스타일의 만화 발전을 위해서라도 잡지는 꼭 필요한 것이다.

반면, 마감이 주는 중압감과 잡지라는 매체가 가질 수 밖에 없는 숙명-매회 재미있어야 한다는 강박증-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나 할까. 또 하나, 상업성 부분은 단행본이든 잡지든 혹은 여타 어떤 대중 문화분야건 안고 가야 하는 숙제이다. 하지만 이런 군소리는 여러 해 겪어 본 후에야 나오는 소리이지, 잡지 초창기에 경험도 뭣도 없던 우리네 만화가들은 우선 희망과 열의에 넘쳤다.

만화 전문 잡지란게 바다 건너 남의 나라 풍경인 것만 같았고 깔끔하게 만들어진 남의 나라 작가들의 서점용 단행본을 그저 부러워하고 있던 우리들은, 일종의 설레임과 열의를 가지고 참 잘해보려고 많이들 노력했다. 약간 궁상맞은 낭만이 존재할 뿐, 사실은 매양 구박받는 대본소를 벗어나 한귀충이나만 만화책도 서점 시대를 연다는, 그런 비원에 가까운 희망이 있었다. 또한 먹고사는 문제에 관한 희망도 있었다. 사람을 많이 모아 복잡한 분업 작업을 통해 원고를 대량 생산해내는 작가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작가든, 근본적으로 만화가의 생활이란 불안정하고 불규칙적이며 경제적으로 취약하다. 우리끼리는 퇴직금도 없는 3D직업이라며 웃곤 한다. 그런 만큼 연재를 통해 고정적인 수입을 얻는다는 건 만화가에게 아주 구미가 당기는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열심히 일하고도 임금 지불이 밀리거나 아예 받지 못하는 억울한 노동자가 있듯이, 원고료가 밀리거나 때로는 떼이는 일도 생긴다는 걸 우리가 알기까지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순진한 열의가 더 많은 모습으로 재미있는 잡지를 만들어 보자며 모두들 노력했다. 모두 노력하는 그 와중에는 나는 그다지 큰 재미가 있지는 않은, 그러나 내게는 소중한 작품인 ‘테르미도르’라는 혁명 변주곡 2탄을 연재했다. 이건 어쩌면 나의 만화 중에 가장 불칠전한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프랑스 혁명 이후를 시대 배경으로 잡다보니 나 자신부터가 그만 내가 느끼는 곤혹스러움과 불편한 심경을 그대로 전달해버리자고 마음 먹었던 것이다. 필시 반응이 좋았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잘리지 않고 연재를 마칠 수 있었다.

중단되어 있던 ‘비천무를 완결하고 나니 훌쩍 1990년대. 만화 잡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게 그 무렵부터였고 잡지사의 부도로 인해 물질적/정신적 피해를 입는 작가들의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렸지만, 그 와중에도 만화 시장은 성장했고 더불어 작가들도 늘어났다. 흔히들 1990년대 초반기를 만화 시장 융성기니 황금기니 하고 부른다. 1980년대 후반부터 성장하기 시작한 잡지 시장과 서점용 단행본 체제가 조금씩 모양새를 갖춰가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저 숫자상의 변화일 뿐이지만 1990년대는 1980년대와는 냄새 자체가 달랐다. 기분 좋은 향기와 시궁 내를 다 담고 있는 그 냄새는 이를테면 사회 전체의 색체가 조금씩 달라져가는 냄새였을까? 좋게 말하면 더욱 자유롭게, 나쁘게 말하면 더욱 간질간질하게. 그 야릇한 간지러움이 좀 지겨워져서 나는 한 잡지에서 연재 의뢰가 들어왔을 때 더욱 무식한(?) 시대로 가 버렸다. 그게 ‘불의 검’이라는 만화다. 그리고 나는 20세기 말에 시작했던 그 만화 ‘불의 검’을 세기가 넘도록 끝맺지를 못하고 있다. 몇 년간 열심히 연재하던 잡지가 갑자기 문을 닫았을 때 마치 마라톤 도중에 주저앉은 주자처럼 피곤했고, 앉은 김에 쉬어가자는 생각을 해버릴 만큼 딴에는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청소년보호법 파동’이 있었고 기막히는 아이엠에프도 있었다. 그 와중에 위태롭게나마 제발로 걸음마를 해보려던 만화판도 쓸모없는 거품에 갇힌 채 슬슬 지반이 내려앉고 있다. 대여점 문제며 유통 문제며 일본 만화 문제며 온갖 문제의 첩첩산중으로 만화판의 고민거리는 전혀 부족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예전이 좋았지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런 늙수그레한 소릴 하기엔 나는 아직 한참 젊고 실재로 예전이 썩 좋았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가끔 주변 사람들에게 농담 삼아 “나는 순간 온수기”라고 말하며 웃곤 하는데, 그건 어느 정도는 진실이다. 현재의 지금 이 순간, 이 느낌, 이 바람이 중요하고 소중하다. 그런 소릴 입에 담는 사람이 매양 사극만 그려대는 건 또 뭐냐고 묻는다면 내 취향이라고 변명할 밖에. 고생하는 후배가 안쓰럽고, 견디다 못해 팬을 꺾은 동료 때문에 가슴이 무너지고, 표현을 구속하는 심의의 벽도 남아 있고, 독자층은 자꾸만 좁아지고, 만화의 다양성은 요원한 문제에다, 선거하러 갈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오는 나라에 살고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남의 원고 위에다 만화와 관련된 없는 인간들이 함부로 푸른 작대기를 그어대지는 않는다. 어린이날 만화책들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지도 않는다. 그래,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아주 오래 걸렸다. 이제 또 얼마나 더 걸릴라나? 그리고 그건 과연 옳은 방향일까? 좋은 향기가 나는 곳일까?

꽤 한참 동안 중얼거려온 것 같다. 나는 만화를 제법 오래 해온 셈이지만 남한테 들려줄 만한 놀라운 에피소드 하나 없고 내세울 만한 충격적인 경험 같은 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저 그냥 내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내 손으로 만화만 그려온 그런 넙치형 인간이다보니, 만화랑 동고동락해온 얘길 해보려고 해도 결국 이런 심심한 이야기의 나열밖엔 없다.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적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볼까. 지금까지 중얼대온 것처럼, 만화가의 삶이란 것도 결국 유난할 게 없다.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생산해내야 하고, 그 결과로 돈을 벌어 먹고 살아야 하며, 아이가 있는 사람은 부모 노릇 하느라 혼줄 빠지고, 많은 이들이 분노하는 일엔 역시 분노하고, 누구나 즐거워하는 일엔 역시 즐거워한다. 자신의 노력이 칭찬받으면 행복하고, 비난받으면 삽시간에 의기소침해진다. 송곳같은 자존심 때문에 상처 입기도 하고 상처 입히기도 한다. 배 아파하기도 하고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한다. 다만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게 있다면, 이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은-적어도 나 자신은-스스로 이 일을 선택했다는 것 아닐까? 취미가 직업이 되면 순수한 즐거움은 사라진다는 걸 절감한 적도 물론 있지만, 놀이가 곧 노동이고 노동이 곧 놀이일 수 있는 이 길. 누가 나를 이 곳으로 등 떠밀지도 않았고 이러구러 살다보니 어쩌다 걷게 된 길도 아니다. 생각하고 표현하고 다시 꿈꿔보고...... 사람들이 이따금 건네는 말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는 사람은 여하간에 기본적인 행복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비록 그 행복이란게 펜선 하나에 기분이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하고 대사 하나가 떠오르질 않아 사흘을 끙끙거려야 하는 그런 것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주저앉은 김에 너무 오래 쉬어 지금 일어서고 있는 중인데도 한참 걸리고 있다. 그래도 일어서다 보면 결국 다 일어설 것이다. 서고 나면 다시 또 걸어가야겠다. 아무래도 체력이 예전 같진 못하니 이번에는 좀 유유히, 유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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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아웃사이더 통권 8호, p179-p195에 걸쳐 실린 만화가 김혜린님의 글을 여기에 올립니다.
# 타자후기: 헥헥 김혜린님 정말 미워할꼬야~ (제가 협박해서 동생이 타자쳐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