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검이란 이름으로 검색해서 기사를 찾기가 쉽지 않던데..
쉽지 않기 때문에 조금한거 하나라도.. 그 주옥같은 기사를 찾았을때의 기쁨이란..
혹시 홈피에 있는 글인가^^: 그래두 그냥 올려봅니당^^
기사가 2001년 1월경에 쓰여졌더군여.. 그럼 잘 감상하셔여^------^
2001년. <불의 검(김혜린, 대원)>이 연재가 시작된 지도 햇수로 꼭 십 년이다. 그동안 작가는 이십대의 치열한 젊음을 넘어서 원숙한 삼십대가 되었고, 십 대의 중학생이던 독자는 이십대의 중반을 향해가고 있다. 주인공인 아라도 세상모르던 소녀에서 산전수전 겪으며 점점 강인한 여인으로 성장했다. 작가의 성장, 독자의 성장 그리고 등장 인물들의 성장에 힘입은 ‘불의 검 1992년산’은 좋은 술처럼 익어가고 있다.
기원전 850년에서 700년 사이, 청동기와 철기의 과도기. 하라무렌(흑룡강) 강줄기를 맥으로 한 지금의 북만주 일대. 이야기의 시작은 간단하다. 카르마키의 압제를 피해 숨어살던 아무르 소녀인 아라가 기억을 잃은 전사, 산마로를 만난다. 여자가, 남자를 만난다, 라는 케케묵은 설정에서 작가 김혜린은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기본재료로 나머지 공백에 상상력을 발휘한다. 멀고 먼 옛날의 이야기지만, 삶과 사랑에 대한 그의 교과서적인 확고한 믿음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작가가 말하는 <불의 검>은 ‘영웅환타지이며 활달한 야만의 노래이고, 무엇보다도 여인의 이야기’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가 역사극을 그려도 SF를 그려도 항상 반복하고 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때묻지 않은 전사인 가라한은 패망한 아무르에 신무기를 가져다 줄 목적으로 철기 부족 카르마키의 야장소에 밀정으로 파견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산업 스파이. 제철과정을 훔치려다 결정적인 순간에 덜미를 잡힌 그는 결국 고생한 보람도 없이 카르마키 군대에 쫓겨 도망치고, 몸에 수많은 상처를 입고 기억을 잃은 채 실카강을 떠내려온다. 아라와 그 아버지의 간호로 회생한 그에겐 철검에 대한 원인 모를 집착만이 남아있다. 어린 시절 카르마키에게 가족을 잃고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꿈도 좌절당하고 -그의 어릴 적 소망은 목동(^^)이 되는 것- 부족을 이끌 수장이 되어야 했던 그는 기억을 잃은 동시에 전사로서의 마음가짐 또한 무장해제 당한 셈이다. 양어깨를 짓누르던 ‘가라한’의 운명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니, 소박한 인간관계에 수줍어하고 감정표현에 서툰 맨살 그대로의 순진한 남자 한 사람만 남는다. 이름도 기억도 없는 그에게 ‘산마로’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신랑각시까지 맺는 아라는 그와 억지로 헤어진 후, 살기 위해 불칼을 두드린다.
산마로가 아라와 있는 도중에 멀쩡히 기억을 찾고, 아라가 촌계집에서 신데렐라가 되는 식으로 얘기가 전개되었더라면 눈물 없는 해피엔딩으로 이 만화는 싱겁게 끝나버렸겠지만, 김혜린월드의 주인공은 언제나 일정한 고생을 감수해야 한다. <북해의 별>, <비천무>, <테르미도르>등을 보시라. 죽도록 고생하는 건 ‘김혜린월드’의 주인공이라면 반드시 겪어야 할 통과의례다. 따라서 <불의 검>의 진정한 시작은 아라가 카르마키 야장 귀족인 수하이바토르의 첩살이를 하며 야장기술을 배우고 가까스로 카르마키를 탈출하여 그것을 아무르에 전하면서부터다. 피가 피를 먹는 전쟁, 아물 틈도 없이 다시 터지는 상처, 그 속에서 눈을 부릅뜨기 위해 택한 생존의 방편이 그녀에겐 불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카르마키가 점령한 땅에서 유일하게 산마로에 대한 기억으로 그녀를 이끌어주고, 노예로서의 굴욕적인 나날을 견디게 만드는 일거리이기도 했다. 또한 아무르로 돌아간 아라에게 야장기술은 생활의 기반이 될 물질과 약간의 생기를 주며 그녀가 고대의 커리어우먼(?)으로 살아갈 여지를 허락한다. 결정적으로 철검은 그녀와 가라한을 이어주는 고마운 물건이기도 하다.
더 이상 아라의 산마로가 아닌 가라한은, 그러나 카르마키에서 탈출한 그녀를 다시 사랑하게 된다. 이름 없는 전사와 촌계집이 아닌, 이번엔 푸른용부의 수장과 애과부라는 상황에서. 쇳물을 부어 칼을 만들고, 죽느냐 죽이느냐의 전투와 먹느냐 먹히느냐의 정쟁에 닳아버린 시대를 살면서도 아라와 산마로는 지고지순하고 비틀림 없이 올곧기만 하다. 일종의 구원적 성격을 띄며 끊임없이 나오는 진정한 사랑은, 그러나, 실카강에서 산마로와 아라가 맺은 일대일의 가시버시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소녀에서 어머니가 되어버린 아라, 모신(母神)으로 추앙받는 아무르의 신녀인 소서노, 잉태할 능력을 잃은 자칭 ‘어미’인 카라는 모두 ‘모성’의 변형된 이미지로-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등장한다. 수하이의 아이를 낳는 바람에 카르마키와 아무르, 어느 곳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하는 아라는 가라한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한 편, 수하이바토르에 대한 미움과 증오조차 연민으로 돌려버린다. ‘모두’를 사랑해야 하는 신녀 소서노는 가라한에 대한 사랑과 마리한의 구애때문에 번뇌하면서도 ‘사랑받지 못하는 자가 아닌 사랑하는 자’라는 발상의 전환(?)으로 카라를 당황시키기도 한다. 한편, 온구트의 정치적·성적 폭력에 넌더리가 난 카라는 남성의 정기를 흡수하며 살아가는 처지에서 역으로 여인천하를 꿈꾸지만, 소서노가 그녀에게 지적한 것처럼 결국 자기자신도 온구트의 아류가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고 있다. 자신의 사악함을 긍정하고 짓밟아온 자들을 더욱 강하게 짓밟으려는 야심이, 카르마키의 여성들에게 ‘어머니’로서 존재하고 싶다는 모성의 욕구와 충돌하여 카라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듯 보인다.
종묘를 잃은 아무르, 재건 세력을 지워버리려는 카르마키, 그 둘 사이를 저울질하며 자기 몫으로 떨어질 떡의 크기를 재는 중원. 후반부에 들어서면 아무르에게마저 약소세력 취급을 받는 에벤키-무타가 등장한다. 정략결혼에 무타와 헤어져야 했던 절우부의 공녀 해조는 소리없이 울면서 얼굴 모르는 남자-가라한에게 시집을 간다. 평소라면 순박하게 땅을 일구고 양을 치고 있을 남자들은 고단한 전선으로 달려나간다. 아무르의 임시망명정부인 바위궁에는 중상모략이 들끓고, 아비가 적인 아이를 둘러 업은 아라는 움집과 야장소를 종종걸음으로 오간다. 마음넉넉한 가수 바리는 그런 아라와 산마로를 축복하고, 마리한과 소서노는 고독한 마음을 다잡은 채 나랏일에 몰두하지만 남모르는 고충과 번민에 휩싸인다.
누구에게나 삶은 무겁고 쉽지 않기에 가라한은 달밤에 얼음도 채 녹지 않은 호수에 잠겨 마음을 달래고 카라는 대마와 하쉬쉬를 들이키며 환락에 빠져든다. <불의 검>에서는 그렇다. 의도적으로 달콤한 궁중의 로맨스나 화려한 생활을 배제해버린, 서걱대는 정서의 북국에서 간절하게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 가라한은 산마로가 되어 자그마한 아내 생각에 밤잠을 못이루고, 비파녀는 사경을 헤매면서도 마리한 걱정에 세상에 미련이 남고, 붉은 꽃 바리는 새로운 노래를 쓰며, 전쟁통에 과부가 된 여인들과 홀아비가 된 싸울아비들은 눈이 맞아 새살림을 차리기도 한다. 이제와서 갑자기 카르마키와 아무르가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라도 출 일은 없겠지만, 작가가 그들에게 소박한 행복이라도 허락했으면. 아홉 권을 내리 달려온 아라, 산마로에게 소서노와 마리한에게 비파녀에게 청산녀와 날쌘마로 곰바우에게 미루에게 말이다.
김계연
kuhn@joycine.com
출처:조이씨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