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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검에 나타난 달의 이미지 (중앙일보 ani&cartoon)
 sun  | 2001·03·07 22:42 | HIT : 839 | VOTE : 76 |
게시일시: 1999/11/08 오후 9:29
게시자: sun
제목: 중앙일보 ani&cartoon 인터넷 기사

〈불의 검〉에 나타난 달의 이미지

정주연 명예기자

김혜린의〈불의 검〉은 철기 시대로 막 접어드는 시대. 아직 신화와 설화
가 자연스럽고, 제정분리의 과도기, 그 중에 `카르마키`와 `아무르`라는
두 부족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고 그러던 중 아무르의 푸른 용의 용사로 불
리는 가라한이 카르마키와 싸우다 기억을 잃고 깊은 산 속으로 피신하면서
얘기가 시작된다.

아버지와 둘이서 적적한 나날을 보내던 아라가 가라한을 구해 간호를 하면
서 둘은 사랑에 빠지고 혼인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산골에도 카르마키가
침입하고, 아라의 아버지는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게다가 가라한은 카르마키에게 끌려가 잃었던 기억을 찾지만 반대로 아라
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한편, 아라는 카르마키의 귀족인 수하이바토르에게 잡혀 그의 아이를 갖게
되고...

이렇게 시작되는 두 연인의 슬픈 사랑 얘기가 〈불의 검〉의 주요 줄거리.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한 축인 카르마키
의 무녀인 카라와 아무르의 신녀인 소서노이다.

고대 신화를 보면 최초로 세상을 만든 것은 여신이다.
여성은 흔히 뱀과 달에 비유되는데, 뱀이 허물을 벗고 새롭게 탄생하는 것
과 달이 시간에 따라 그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이 여성의 임신 모습과 형상
적으로도 유사하고, 새로운 생명, 재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도 그리스의 현자들은 모두 뱀이 그려진 지팡이를 들고 나온다. 뱀
은 또한 차가운 피를 가진 파충류로 여성의 마녀적인 힘을 상징한다. 신화
속의 전쟁의 신 역시 여신이다. 또 뱀은 남근을 상징하여 여신에게 봉양하
는 제물의 의미를 갖는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중국 창세 신화 중에 활쏘는 신의 아내인 항아의 이야기가 있다.
천자의 미움을 받아 땅으로 내려오게 된 항아는 불사의 약을 구하는데, 약
을 혼자 먹으면 하늘로 가게 되고 남편과 함께 먹으면 인간 세상에서 영원
히 죽지 않는다고 한다.
항아는 혼자 하늘로 가는 것을 택하고 달나라로 가서 두꺼비가 된다. (달
의 분화구를 설명하는 것인 듯?)

신화마다 달의 여신은 일부일처의 관계가 아닌 영원한 처녀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성관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적 관계
와 삶에서 주체가 된다는 의미이다. 실제 모계 사회에서는 어머니가 누군지
는 알아도 아버지가 누군지는 상관치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남성보다 우월한 여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성에게는 초승
달에서 보름달, 다시 그믐으로 가는 변화와 재생의 두 모습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검은달`과 `흰달`의 이미지라고 한다.
달은 그 알 수 없는 변화로 고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악마적인 매력을 가
진 동시에 만물을 생장시키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닌 존재다. 옛날 사람들
은 만물을 생장시키는 것이 해가 아닌 달이라고 믿어 임신을 원하는 여자들
은 달빛을 쐬게 했다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소서노는 우리 나라 무당이 신내림을 받듯이 어릴 때부터 신녀로 키워져왔
다.
신녀에게는 보통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평범한 삶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
래서 그녀는 가라한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애써 감춰야 했고, 아무르의 수장
인 마리한의 사랑을 거부해야 하는 아픔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아무르 부족민들은 보든 문제를 하나하나 소서노에게 의지한다. 그들에게
소서노는 어머니이자 모두를 보살피는 의사이고 신과 연결되는 유일한 존재
이다. 그래서 상냥하되, 부드러움을 절제해야 하고, 뜨거운 정열이 있으나
초탈함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고독하다.

카라는 카르마키 왕의 여동생으로 남자의 정기를 빼앗는 여자라고 할 수 있
다. `카라`는 몽골어로 `검다`는 의미다. 터키 혈통으로 피부도 검은 그녀
는 마음속도 검다고 주장하며 그렇게 보이려고 애쓴다. 고대 사회 마력의
주술사이며 남자의 정기를 빼앗는 요녀이며 야심 있는 정치가이다. 여기서
소서노는 전형적인 하얀 달의 이미지이고 카라는 남성의 정신을 혼란시키
는, 위험하면서도 매력 있는 검은 달의 전형처럼 보인다.

카라는 남편을 바꿔가당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던 고대 신화 속의 여
성과 닮아 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로적 정신과 디오니소스적인 정신을 구분
하고 있다. 아폴로는 태양의 신으로 빛과 광명의 신이다.

빛은 사물 각각을 구별하고 제 모습을 드러나게 한다. 이것은 이성이라는
것으로 사물을 분해하고 속성을 분석해야 그 사물을 알게 된다고 보는 서구
의 정신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술과 음악의 신으로 나와 남, 상하의 구
분을 몽롱하게 만든다. 사물을 하나하나 개별화시키는 게 아니라 서로간의
경계를 허물고 사람을 도취시켜 일체화한다.

무녀들이 드리는 제사는 둥근 보름달이 뜬 밤에 이루어진다. 거기에서는 북
소리, 종소리 곡소리와 함께 우두머리인 족장이나 신녀나, 하층 백성이나,
모두가 어우러져서 도취되고 몰입하는 상태가 된다. 그 차가운 밤의 기운에
서는 나와 너, 선과 악의 구분도 사라진다.
제의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 낮에는 그런 경지
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인간이 우주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가진 이래 우
리는 태양계와 지구, 달, 우주에 대해 많은 지식을 쌓았다. 그러나 그래서
우리가 우주에 대해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 또 우리가 별을 보며 느끼는
알 수 없는 신비감을 그런 지식들이 감소시킬 수 있을까? 이런 제의 장면
은 모든 인간이 원형적으로 갖고 있는 정열, 폭력성, 감성을 건드린다.
그러나 이 보름달은 소서노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버려야만 하는 때이기
도 하다. 소서노가 가라한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괴로워 할 때마다 배경은
그믐달이다. 달은 시간변화와 함께 자신의 모습을 바꾸면서 소서노의 감정
변화까지 대변한다.

카라는 자신의 친오빠를 죽이고 권력을 잡게 되는데, 이 때, 친족을 살해하
는 악녀의 모습과 함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인다. 카라가 남자들에게
잔인해진 이유는 그녀가 어릴 때부터 알아온 남자들이 모두 잔인하고 여자
를 농락하는 사람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여자는 얼핏 보면 적대 관계에 있는 듯 보이지만 누구보다도 서로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누구보다 강한 척, 다 알
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하지만 그들 역시 위로받기를 원하는 인간이다.

소서노에게도 검은 달의 속성이 내재되어 있고, 카라에게도 비난만 할 수
없는 면이 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카라는 악녀이상의 슬픔이 느껴진다.
모든 부족 사람들에게 천사처럼 떠받들어지는 소서노지만, 정작 자신이 사
모하는 사람에겐 말도 꺼내볼 수 없다. 두 여자는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지
만 하나인 모습이고 우리가 잊고 있는 여성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
이 아닐까.

작가는 그런 여성의 두 가지 속성을 놀랄 만큼 잘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독자에게도 무리 없이 통하는 것을 보면 모든 인간, 특히 여성의 기억 저
너머에 원초적으로 자리 잡은 달의 두 가지 이미지는 공통된 것 같다.

고대사를 배경으로 상상력을 발휘한 것만 봐도 그런 의도가 묻어난다.
강한 듯 약하고 약한 듯 강한 두 여자가 극단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극을
끌어가는 아라는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여성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고서도 자신을 버리지 않고 철검을 만들어 가
라한에게 주는 모습은 소서노와 카라가 낮이라는 시간 속에 모습을 드러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시기를 떠올릴 때 우리가 하기 쉬운 남성
적인 싸움, 전투, 폭력이 아니라 여성의 노력과 끈질긴 집념으로 철기 발전
이 이루어졌다는 견해 역시 새로운 느낌을 준다.

신화는 세상에 대한 아무런 분석이 없던 고대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았
는지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런만큼 인간의 원형적인 감정들과 가장 근접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여성 작가가 상상력으로 이뤄낸 이 작품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이 만화를 읽으며 느꼈던 무아지경과 모든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 한마음이
되는 그런 순간이 지금의 현실에서도 느낄 수 있었으면...

1999년 11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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