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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불의 검... 어느 휴머니스트의 비가' 중에서
 유제니  | 2004·03·02 22:24 | HIT : 1,314 | VOTE : 59 |
2004년 3월 첫째주 딴지일보, [팬더의 만화 길라잡이]의 주제가 '불의 검'이군요.
근데 내용이 너무 길고 (내용의 반은 한국 순정만화가 어떻게 흘러왔는가이고,
그림도 너무 많아서...) 전부 복사하려니 실력이 부족하네요.
그래서 일부만 여기 옮깁니다. 전문이 궁금하신 분은 딴지일보로...^^;;
(참, 그리고 저는 회원방의 유제닙니당. --;;)
전문을 옮기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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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는 왜 <불의 검>에 열광하는 것일까?

요즘 간간히 TV 토론 프로에 얼굴을 보이는 이주향 교수가 지난 2000 년 6 월 <나는 만화에서 철학을 본다>라는 책을 출간한 적이 있다. 어지간한 만화광이다라는 표현이 오갔지만, 당시 분위기는 대학 교수씩이나 되는 사람도 만화에서 뭔가 배울 게 있다며, 그것도 '철학' 씩이나 되는 고고한 학문을 이야기 한다는 사실에 작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녀가 어떤 센세이션을 목적으로 책을 만들었던, 그녀의 튀기 위한 생존전략으로 책을 냈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만화라는, 소위 말해서 이 사회에서 '하위문화' 로 받아들여지는 문화를 당당히 문화의 전면으로 내세웠다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일이었다.

이 책에서 다룬 그 '철학' 중에 필자가 의미있게 본 것이 바로 '카라論' 이었다. 지금까지와의 악녀와 다르게 카라의 행동에는 분명 전과 후가 있었고, 행동에 대한 이유가 있었다. 왕이자 오래비인 온구트에 의해 어렸을 적부터 성적 노리개가 되어 온구트의 힘에 짓눌려 카르마키의 신녀이자 모주이면서도 또한 오래비에게 근친상간을 당해야 했던 한 여자는 그렇게 독기를 품고 온구트를 몰아세우려 했다. 여자로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온구트에게 거세 당한 카라.. 육체를 탐닉하면서도 언제나 허허로운 눈빛으로 단순히 쾌락을 쫓는 듯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큰 틀이 그려져 있었다. 카르마키의 진정한 모주(母主)가 되려는 틀... 그리고 실제 모주가 되긴 되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받지 아니한다 하였던가? 여하튼 당시 이주향 교수는 <불의 검>에 대해 그런 식의 나름의 평가를 내렸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어떤 느낌으로 이 작품을 봤을까? 그리고 김혜린은 어떤 생각으로 <불의 검>을 그렸을까?

...(중략) 또 영웅찬가냐? 또 징징비극이냐? 또 사극이냐? 등등... 투덜대는 말씀을 일단은 겸허하게 접수해 두면서, 고백하건데- 이것은 영웅 환타지이며 활달한 야만의 노래다. 동시에 무엇보다도 여인의 이야기이다. 비록 나의 희망사항에 그친 변명일지라도...(이하생략)

1992 년 12 월 25 일 [댕기]에서 나온 <불의 검> 1 권 머릿부분에 나와있는 '작가의 말' 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필자는 이 작가의 말에 <불의 검>에 관한 모든 미덕이 다 담겨져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일단 작품이 가지고 있는 미덕에 대해 한 가지씩 짚어 나가자.

첫째, 이건 좀 의외의 말일지 모르는데, <불의 검>은 김혜린 작화의 완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마 김혜린의 작품을 다 보신 분이라면 느끼시겠지만, 김혜린 작화의 완성은 <비천무> 후반부에서 느낄수 있는데, 보통 조금 긴 연재라던가, 작가가 자신의 그림체를 완성시키지 못한 상황의 연재중에 '성장' 해 나가다 보면, 나중에 처음부터 다시 한 번 보게 되면 확 눈에 띄는 게 바로 '작화' 이다.

김혜린의 <북해의 별>을 보다가 <비천무>를 보면, 뭔가 그림체가 확 튀는 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다 <비천무> 후반부로 가면 지금의 김혜린 그림체를 확인하게 된다. <불의 검>의 경우, 일단 완성된 김혜린의 그림체가 1 권부터 11 권까지 일정하게 유지된 작품이다. 작화에 있어선 이미 '완성화' 되었단 말이다. 거기에다가 데뷔 20 년 동안의 노하우가 이제 농염하다 못해 고혹적으로 펼쳐진다. 20 대의 치기도, 30 대의 노련미를 거쳐 40 대의 농염함으로 그림은 이제 춤을 추기 시작한다. 거기에 더해 김혜린이 주무기(?)로 사용하는 먹이 제대로 날개를 단 작품이 이 <불의 검>이기도 하다. 김혜린은 스크린톤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의 말로는 “비싸고, 일제가 많아서” 라지만, 따져보면 그녀의 먹을 쓰는 능력, 먹으로 농담(濃淡)을 표현하는 걸 넘어서 등장인물과 상황의 분위기 전반을 먹 하나에 의존해서도 다 표현해낼 만한 능력이 만개한 작품이 <불의 검>이다. <비천무> 시절부터 동양적 사극에 맛을 들인(?) 작가에게 먹은 동양적 만화에 제격인 도구였고, <불의 검>에선 일상화를 넘어서 김혜린 작화의 특징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둘째, 사극이었다. 김혜린의 작품은 데뷔작에서부터 순정만화 작가로선 표현하기 어려운 권력의 속성에 대해 너무도 그 핵심을 잘 표현해 내고 있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북해의 별>이 그랬으며, <테르미도르>와 <비천무>까지 김혜린은 권력 내의 암투와 권력과 인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그 어떤 순정만화 작가들보다 내밀한 묘사를 보여주었다. 그런 김혜린의 특성이 만개한 것이 또한 <불의 검>이었다. 남쪽 나라... 중국에서 건너온 제백과 천궁과의 정치적 밀담. 검을 쥐고 군권의 한 가운데 있는 가라한 아사와 천궁과의 관계, 친구이기 이전에 신하와 군주의 관계, 친구로선 믿고 있으나 신하로선 군권을 가지고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는 위험한 2 인자로서의 관계, 이 둘 사이에 갈등하는 천궁과 그 모든 걸 이해해 주는 가라한. 그리고 주변에 들끓는 간신과 모리배...

김혜린은 간신이라 불릴 만한 존재들에 대해서도 그 나름의 '이유' 와 '존재가치' 를 충분히 설명해 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사람은 약하기 때문' 일까? 단순히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간신이나 모리배들도 사람을 통치하는 데에 필요하고, 그만의 위치와 존재가치가 있음을 김혜린은 조용히 보여준다. 그것이 권력이란 걸 김혜린은 독자들에게 부지불식간에 보여주고 있다.

셋째, <불의 검>의 주인공 가라한 아사는 그녀 작품에 언제나 등장하는 보편타당한 상식에 근거한 '영웅' 의 모습이다. <불의 검>이라는 이야기 자체는 B.C 850 ~ 700 년경 한민족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예맥족인 아무르 족과 이들을 노리는 유목민족인 카르마키의 전쟁상황이 그 배경이다. 문제는 카르마키 쪽이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먼저 접어들면서 아무르를 정복하게 되고, 아무르는 여기에 대항해 항전하는 가운데, 아무르 족의 푸른용부(이 시대는 아직 절대왕권이 확립된 게 아니었다)의 수장인 가라한이 카르마키로 잠입 철기의 비밀을 캐내려다 잡히게 되고, 고문으로 인한 기억상실증에 걸린 상태에서 아라와 접하게 된다. 당연히 이 둘은 사랑을 하게 되고, 다시 잡힌 가라한 아사는 카라에 의해 그 기억상실증이 풀리고, 신전 공사장에서 탈출, 아무르의 영토회복을 위해 싸워 나간다....뭐 대충 이게 <불의 검>의 큰 이야기 줄거리이다.

아라가 아사를 위해 불칼(불의 검은 철검을 의미한다)을 만들어 아무르도 철기를 가지게 되면서 이야기가 좀 스펙타클해지는데, 격동의 한 가운데에서 가라한 아사는 자신의 여자와 자신의 전사대와, 자신의 왕이자 친구, 자신의 백성들과 아무르란 국가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워 나간다. 아라녀에 대한 절절한 사랑만이 아니라 지극히 보편타당한 상식과 도덕률에 근거한 그의 모습은 말 그대로 '영웅' 그 자체였다. 아파도 아니 아파하고, 슬퍼도 아니 슬퍼하고, 그 모든 번뇌과 아픔을 들고 그는 칼을 휘두른다. 이 작품은 가라한 아사의 그 애끓는 영웅담 하나만으로 충분히 인정받을 작품이었던 것이다.

넷째, 이 이야기는 '여자의 이야기' 이다. 김혜린의 코멘트가 없더라도 이 작품이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건 작품을 펴보는 순간 알 수 있을 것이다. <불의 검>은 전쟁이라는 격동의 한 가운데를 그려내면서 그닥 선명한 전투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가라한이 신궁 공사장을 탈출할 때의 전투씬 두 번, 천궁이 위계에 걸려 자신의 아내를 잃을 때의 장면 하나, 우르판과 가라한의 맞대결 정도가 기억에 남는 전투 장면일 뿐 그닥 인상 깊은 전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것이 전쟁의 한 가운데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바로 '전쟁터의 여자들' 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불의 검>의 남자들은 전쟁과 살육의 가해자들일 뿐이고, 그들 뒤에서 신음하며, 아파하며, 종국에 가선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노력하고, 아픈 이들을 감싸안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아니 바로 그 여자들의 이야기가 바로 <불의 검>이다. 김혜린의 말처럼 <불의 검>은 여자들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음.. 이 이야기 한 번 찐하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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