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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시: 2000/04/06 오후 12:38
게시자: 뭉실이
제목: [정보] 김혜린 `비천무` vs 이인화 `시인의 별`

* 인터넷 정론지 대자보(http://jabo.co.kr)에서 퍼온 글이라는 것을 웹진
[DEW] 게시판에서 발견했는데, 정확한 출처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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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만화, 소설에게 묻다
- 이인화, [시인의 별]과 김혜린, {비천무}에 대하여 -

김기정 문학평론가 [비평과 전망] 동인

이인화의 [시인의 별]이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것을 놓고 문화계 전반이 뜨
겁지만 당사자인 문학사상사측은 성의 없는 답변으로 대응하고 있다. 대자
보는 이번 이상문학상 파동을 보다 심층적으로 접근하기 위하여 이번 기획
을 시도했다. 젊은 비평가들의 거침없는 비판의 목소리를 문학사상사측은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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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대나무 숲에 앉아 (獨坐幽篁裏)
거문고를 뜯고 휘파람을 분다. (彈琴後長嘯)
깊은 숲속이라 다른 사람은 모르거니 (深林人不知)
밝은 달이 와 비추어 준다. (明月來相照)
- 왕유(王維)의 죽리관(竹里館), {비천무(飛天舞)} 중

몽고족이 한족을 통치하던 원나라, 1343년 봄 하북성 산매현에서 14살 동
갑내기 `설리(雪莉)`와 `자하랑(紫霞狼)`이 만난다. 말리꽃이 흩날리는 작
은 들에 살랑이는 비단 옷자락, 새침한 손매무새의 작은 소녀가 무명옷의
단단한 소년에게 다가간다. 이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잔혹한 운명을 예견이나 하듯이 주위는 고요하고 바람은 살갑다. 결국 이
들은 사랑하게 되지만 한족인 자하랑과 몽고인인 설리는 이루어질 수 없었
고 그리하여 설리는 정략결혼을 하게 되는 한편 자하랑은 청부자객으로 활
동, 설리를 찾으며 고된 삶을 살다 다시 만나 죽음을 함께 한다는 것이 김
혜린의 만화 {비천무}의 주된 내용이다. 물론 전 13권으로 완결(1991)되었
다가 다시 두 번에 걸쳐 재간되어 6권(1997)으로 다시 펴낸 방대한 내용에
비해 이것은 턱없이 모자란 요약이 되겠으나 결국 중심을 이루는 내용은
이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비천무가 비단 이러한 로맨스에 그치는 것
은 아니다.

불우한 시대를 살아가는 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거대함과 결국은
그것에 굴복하게 되지만 굴복하게 되기까지의, 운명을 넘어서는 고된 행로
와 굴복이 굴복이랄 수만은 없는 삶에 대한 적극적 인식이 담겨 있다. 이
연장선상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뛰어넘어 낙원으로 방향을 바꾸기보
다는 현실에 처연하게 남는 것을 인정하는 또 다른 측면에서의 불우하기도
하고 용감하기도 한 인생 또한 그려져 있다. 작가는 이러한 인생들을 방대
한 역사적 격변기의 혼란을 배경으로 하여 보여준다. 이 만화가 만화계에
서는 암암리에 명작으로 인정되는 것은(우리 나라 만화에서는 드물게 두
번의 재간을 하고 영화화된 것으로 이것은 입증된다) 어찌할 수 없는 시대
를 살아가는 인물군들이 비단 그 시대에 머무르는 상이 아니라 시대를 초
월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정도의 차이가 있겠고 인식의 차이가 있겠으나 운명이란 것 앞에
서의 무력함이 다시 우리의 인생에 그대로 내려앉을 때 우리는 그들의 삶
을 단지 과거의 어떤 것으로 묻어버릴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렇듯 배경적
측면(단적으로 말리꽃 은은히 나부끼는 산매현과 연꽃 붉고 가을 바람 부
는 고모 못이 무에 그리 다르겠는가)뿐만 아니라 비극적 운명을 짊어진 자
의 사랑에 대한, 현실에 대한 애환이 결국에는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면에
서 {비천무}는 이인화의 [시인의 별]과 닮을 꼴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별]은 대략 출세하지 못한 불우한 지식인 `안현`이 몽고인인 `이
아치`에게 운명적으로 자신의 아내를 빼앗기고 아내를 찾기 위해 유랑하다
다시 만나게 되지만 아내는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여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처형당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역사적인 근거를 통하여 재구
성했다는 측면과 주석을 다는, 새로운 형식의 소설이라는 점을 논외로 할
수는 없겠으나 내용적인 면만을 본다면 {비천무}와 그리 다를 것이 없다.
또한 불우한 인물을 설정,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형상화
되고 다시 재회하지만 결국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운명에 대한
비극적 인식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삶이 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의 우리에게 내려앉게 되는 것이 이들 작품의
주된 감동의 근원이라고 할 때 이 시점에서 필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소설적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 그 중에서도 일류([시인의 별]
이 현 시점에서 가장 권위 있다고 인정되는 문학상 중의 하나인 `이상문학
상`을 수상했다고 볼 때 이 작품은 일류라고 말하여 질 수 있어야 할 것이
다)라고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어떠한 잣대를 통하여 구분될 수 있
을 것인가. 또한 예술성을 부여받은, 혜택받은 분야와 단지 상업적이라 하
여 논외로 치는 불우한 여타 장르의 작품들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구획 지
어지는 것인가. 별 의문의 제기 없이 대부분이 암암리에 인식하고 있는 소
설과 만화의 인정적 측면에서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는 것이다.

진형준은 작품론에서 `주석이란, 역사성, 시대성과 함께 초월성을 함께 묻
겠다는 이인화의 야심`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새로운 것을
모색했다는 것만으로 로맨스가 로맨스 아님이 되는 것은 아니며 형식의 새
로움이 여타의 미흡한 부분을 모두 감싸안을 수 있는 존재 가치를 지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또한 주석이라고 달고는 있으나
그것이 단락을 구분하고 소제목을 취하는 것과 별 다른 효과를 보이지 못
하고 있음에도 주목해야 한다. 단지 주석이라는 고문에 주로 쓰이는 형식
을 소설에 취하여 새로운 소제목을 달았다고 하여 `역사성과 시대성을 함
께 묻겠다는 야심`이라고 한다면 옛것과의 조화를 이룬 작품은 모두 의당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비약적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의 별]이 `삶의 그 어떤 원형, 운명의 그 어떤 원형을 우리에게 보여
줌과 동시에, 우리가 잃어버릴 수 있는 유토피아의 꿈, 근원적인 꿈을 환
기시`키고 있다는 평가 또한 이 작품이 소설적으로 단단한 입지를 구축하
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면이 없지 않다. 이것은 비단
[시인의 별]이 지니는 독자적 메시지가 아니라 대다수의 작품들이 공통적
으로 지니는 전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을 짊어지고 나가는 동안,
거대한(비록 거대하지 않더라도) 운명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일련
의 인물군을 담은 작품들이(그것이 비극이 되든, 희극이 되든 간에) 특정
의 삶을 보여주면서 종래에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보편적 삶이 어떠한 가
치를 지닌다는 메시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비교의 대상으로 삼은
{비천무}가 드러내는 인식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먼저 이 작품이 순정만화에서 사극을 도입하는 새로운 형식을 취하는 획기
적인 작품이었다는 점이 지금의 [시인의 별]이 주석이라는 고전적인 형태
를 취하면서 역사적인 것과의 결합을 시도했다 하여 높은 평가를 받는 부
분과 같은 맥락에서 평가될 만하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보다 근
본적으로 설리가 어찌할 수 없이 운명의 힘에 이끌려 정략결혼을 하지만
다시 운명을 넘어서 자하랑과의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어떤 근본적인, 그리하여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거대함을 보게 된다. 여
기에서 더욱 주목을 요하는 것은 설리와 자하랑이 세상에 남긴 아들의 삶
이다. 그는 이 비극적 운명에 귀속되기를 거부하고 현실에 귀속되기를 선
택하는 인물로, 초월적인 꿈을 실현하고 있는 두 인물과는 다른 선상에 놓
이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현실에 대한, 운명에 대한 초월이며 유토
피아에 대한 근원적인 꿈의 발현인지 아득해지는 시점에서 작가는 `내가
사랑하는 역사, 내가 꿈꾸는 시대, 내가 슬퍼하는 것들, 내가 노여워할 수
밖에 없는 것들, 꽃을 뿌려주고픈 사랑들, 목숨의 힘... 세월의 힘...`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결국 {비천무}는 지극히 통속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로맨스에 시대가 가진 힘과 각 개인의 삶에 지워진 짐의 무게가 어우
러져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우리가 논외로 치부하고 때로는 멸시하기까지 했던 상업적인 순정
만화 {비천무}와 이인화의 [시인의 별]이 지니는 전언이 그리 다르지 않다
고 한다면, 이 작품만의 고유한 가치는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지 막막해진
다. 여러 평자들이 거론하듯이 주석이라는 새로운 시도가 이 소설에 소설
다움을 부여해줄 수 있다고 말하기에는 역시 무리가 있다. 소설이라는 것
이 형식만을 운운해서 채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거론했
듯이 주석이 이 소설에 어떤 다른 힘을 실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
한다면 의문의 답은 더욱 묘연해진다.

논의를 진행시킬수록 우리가 진정 소설적이라고, 그리하여 다르게는 예술
적이라고 하는 것들과 언급되기를 거부당해온 여타의 다른 장르의 작품들
과의 경계는 모호해져만 간다. 이제 침묵할 시간이다. 뚫고 지나갈 길이
막막하고 어지러울 때는 잠시 침묵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나 한
가지, 김혜린이 자신이 그려내는 전언을 `그저 그런 것들`이라고 명명하면
서 `그저 공명해 주었으면` 하고 소박하게 바라는 것이 `내 것에는 이러이
러한 심각한 것이 있소이다`라는 어조의 발언보다 더한 공명감을 갖는 것
이 단지 어조가 갖는 힘에 대한 거부감 때문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