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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들기 시작한 생각을 정리해서 이 게시판에 올립니다. 만약 후대의 한국 역사학자들이 김혜린 선생님을 평가한다면, 그들은 어떤 점에 주목할까요? 한국 순정만화가 진화하는 데 기여하신 점? 맞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김혜린 선생님은 한국/조선 공화국(수도 평양)의 고대사를 소재로 가상 역사물(실제 역사는 아니지만, 역사를 소재로 삼은 작품)을, ‘한국형 환상(판타지) 만화’를 만드신 분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이제까지 ‘환상 소설’이나 ‘환상 만화’하면 중세 서양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그러나 역사상의 서양과는 다른) 세계를 다룬 작품이나, 중세/근세의 중국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이것도 역사상의 중국과는 상관이 없지요) 강호(江湖)를 다룬 무협물을 떠올렸지요.
그런데 김혜린 선생님이『불의 검』을 내놓으신 뒤로는 모든 게 바뀌었단 말입니다. 사람들은 난쟁이나 요정이나 용이나 마법이 없어도, 무공이나 협객이나 정파나 사파가 없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 한국과 조선 공화국의 고대사라는 소재로도 얼마든지 가상의 역사와 대 서사시를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선생님이 ‘제 3의 길’이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신 겁니다.
수십 년 전 환상문학이라는 장르를 만드신 J. R. R. 톨킨 선생님이 오늘날에는 선구자로 대접받듯이, 김혜린 선생님도 나중에는 ‘한국/조선식 환상물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위대한 만화가’로 평가받으실 겁니다.
- 덧붙임(사족) :
김혜린 선생님이 지피신 이 ‘불’(한국/조선식 환상물)이 꺼지지 않게 지켜야 하는 게 우리의 사명인데, 안타깝게도 요즘은 나서는 사람이 없네요.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저라도 나설까 합니다. C. S. 루이스가『나니아 연대기』를 쓰자 J. R. R. 톨킨이 그 뒤를 이어『반지의 제왕』을 썼듯이, 김혜린 선생님의 뒤를 이어 제가 ‘한국/조선식 환상물’을 만들되 시대와 나오는 사람들과 주변 환경은 선생님의 작품과는 다르게 정할 거예요. 어쩌면 선생님이 다루시는 ‘주제’와 다른 주제를 다룰지도 모릅니다(『반지의 제왕』이『나니아 연대기』와 같으면 안 되죠. 둘은 ‘환상문학’이라는 큰 틀 안에 있는 작품이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다르잖아요?).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만화가가 되려고 만화를 그리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을 찾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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