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글방 :김혜린]


   좀처럼 외출을 하지않는 나지만 이따끔은 바깥 바람을 쐬야 할 일이 있다. 한 일주일 전이던가.볼 일을 마치고 집으로 집 어귀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7,8살쯤된 여자 아이 하나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길바닥에 침을 뱉더니 (눈을 감고) 손뼉을 치며 한쪽 발로 잼잼, 가만 보니 한구석에 쥐 한 마리가 죽어 있다. 아하- 나도 저만한 때는 그랬다. 컴컴한 시골 밤 상여집 앞은 주문을 외며 지나야 귀신이 붙지 않았고, 빈 외양간 앞은 눈 감고 일곱을 셀  동안 지나가야 한다.

   하아퍼 리의 소설 '아이들이 심판한 나라'에 나오는 두 어린이 젬과 스카우트도 도깨비밖에 무서운 것이 없었던 철부지들이다.

   무대는 1930년대 전형적인 미국 남부의 소읍 메이코움.

   천진한 스카우트가 도깨비 아닌 사람 때문에 낭패를 겪기 시작하는 것은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 부터이다. 젊고 맹목적인 열정을 가진 여선생은, 이미 읽고 쓸 줄 아는 스카우트를 문제아 취급하며 2년 동안 일체의 글쓰기를 금지한다. 다른 아이들과 '평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평등'이란 '편견'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이 소설은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그 하나는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야 잠시 실제로 등장하는 부우 채들리, 그는 스카우트의 앞집에 25년 간이나 은둔해 모습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시종일관 두 어린이의 공포와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소설의 중심 축은 아버지 애티커스가 변호를 맡은 톰 로빈슨 사건이다. 톰 로빈슨은 죄가 없으며,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지만 오직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강간죄로 기소된다. 애티커스는 '검둥이 애호가'라는 비난과 생명의 위협까지도 감수한 채 사건을 끝까지 맡아 마침내 법정에서 말한다.

   "이 나라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된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무일푼의 사람도 록펠러와 동등하고, 우둔한 사람도 아인슈타인과 동등하고, 무식한 사람이라도 여 느 대학 총장과 동등하게 하는, 인간이 세운 한 기관이 있습니다. 그 기관이 여러분의 법원인 것입니다."

   그러나 백인들로 구성된 그 법원은 톰 로빈슨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다. '추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어째서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는 아이들에게 애티커스는 말한다. "모르겠다, 그들은 전에도 그런 짓을 했고, 오늘밤에도 했고, 앞으로도 또 할 것이고- 그들이 그런 짓을 할 땐, 아이들만이 우는 것 같구나"

   이 소설에는 다수의 무지한 대중이 등장한다. 혈통으로 사람을 저울질하는 고모 알렉산드리아, 우아한 목소리로 자신의 자선사업을 자랑하면서도 사랑이란 것을 모르는 미시즈 메리워드, '박해는 편견이 있는 사람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라며 히틀러를 열렬히 비난하면서도 막상 자기 이웃의 흑인들에 대해서는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 한다"는 선생 게이츠.

   이들 편견에 사로잡힌 대중들이야말로 작가 하아퍼 리가 고발하고 있는 인간 일반인 것이다. 이 소설은 단순히 인종 차별에 대한 항변만은 아니다.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다수의 얼굴없는 대중은 그 무자비한 익명의 힘으로 부당한 폭력을 행사해 왔다. 톰 로빈슨은 그 폭력의 숱한 희생물 중의 하나였으며, 애티커스는 육손이 나라에 온 정상인과 같이, '다수결 원칙을 따르지 않는 유일한 것 -즉 양심'을 지닌 까닭으로 조롱 당하는 의식있는 개인이다. 큰 목소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진실은 너무 큰 용기가 필요로 한다. '질 것을 알면서도 하여간 시작해야 하는.

   오늘도 신문은 습관처럼 많은 안타까운 사건들을 보도하고 있다. 이 좁은 나라 안의 뿌리 깊은 지역감정 문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처럼 허탈해지는 날, 그래도 나는 이 소설의 끝부분을 상기한다. 스카우트와 젬이 뻔뻔한 고발자 이웰의 보복 습격을 당할 때 구해준 이가 부우 래들리였음을, 사람을 싫어해 25년 간이나 은둔해 왔던 그였음에도 스스로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이들에 대한 순수한 사랑 때문이었던 것이다.

   차갑지만, 그러기에 더 따뜻이 품어야 하는 이 세상. 그래도 '사랑'이 남아 있음으로 살 만한 세상, 나도 애티커스의 말을 흉내내 보자.

   "대개는 결국 알고 보면 좋은 사람들인 거야, 스카우트."

《르네상스》 90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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