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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무』의 아리수 부인(夫人)께 드리는 서신(書信)
 돌베개    | 2018·03·31 21:15 | HIT : 76 | VOTE : 9 |
아리수(阿利水) 부인(아래 ‘부인’), 열두 해 전에 써서 보내드렸어야 할 서신(書信)을 이제야 보내드립니다. 늦었지만, 부디 이 서신이 망향단으로 가기를 - 그리고 부인께서 이 서신을 읽으실 수 있기를 - 빕니다.

소생(小生 : 돌베개)은 부인이 남궁 성 선생(아래 ‘남궁 선생’/‘선생’)과 혼인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을 듣고, 붓을 들어 서신을 쓰려고 했지만, 여러 가지 일을 겪다 보니, 따로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 다짐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고, 느낀 것을 글로 말씀드려야 하기에, 비록 모자라는 글 솜씨를 지녔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재주도 적으나,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붓을 들기로 했습니다. 만약 이 서신을 읽고 노하셨다면, 그 때는 소생만 비난하고, 다른 사람들은 비난하지 마소서.

부인은 낭자(娘子) 시절, 아직은 ‘공자(公子)’였던 남궁 선생에게 “왜 (유진하 대협[大俠]. - 아래 ‘유 대협’ -을) ‘아버지’라고 불러 드리지 않았니? … (그 분을 스승으로서) 사랑하고 있으면서 ….”하고 물어보셨죠?  그 때 부인이 울면서 외친 모습과, 선생이 지은 표정이 잊히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여러모로 착잡했어요. 부인이 오라버님(아신 님)의 의형(義兄)인 유 대협을 아끼시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남궁 선생이 머뭇거리고 말을 아낀 것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부인께 한 가지는 말씀드려야겠어요. 이건 이해나 안타까움과는 따로 다루어야 하는 ‘사실’이고, 소생이 느낀 것이며, 한 발짝 떨어져서 일이 돌아가는 걸 지켜본 ‘남’으로서 말씀드리는 것이니, 부디 너무 노하지는 마시기를 빕니다(미리 말씀드리거니와, 소생은 ‘부드러운 글쟁이’가 아니라서, 부인이 읽고 싶어 하시는 것만 적을 수는 없습니다).

부인, 부인이 선생에게 말씀하시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세요. 남궁 선생이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그 분은 자신의 친아버님이 유(劉) 대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의붓아버님이신 남궁준광 ‘대인(大人)’이 자신의 친아버님인 줄 알고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남궁준광 대인의 친딸이자, 자신의 이부(異父) 자매고, 누이동생인 ‘남궁연아’ 소저(아래 ‘남궁 소저’)를 아끼셨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유 대협(자하랑)의 철기십조가 들이닥쳐 남궁세가를 무너뜨렸고, 남궁 선생은 자신의 할아버님이 유 대협에게 죽임을 당하고, 집이 ‘약탈’당하고, 남궁 소저가 철기십조의 말발굽에 짓밟혀 죽는 걸 두 눈으로 지켜보셔야 했습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유 대협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남궁 선생이 유 대협한테 원한을 품으신 건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선생은 자신의 어머님이신 ‘타루가 설리’ 부인(夫人)한테서 사건의 진상을 직접 전해 듣기 전에 아리수 부인한테 “왜 네 스승님이자, (친)아버지인 분한테 예의를 표하지 않는 거야?”하는 말씀을 들으셨지요. 부인은 선생이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만 드러내셨습니다.

선생은 자신이 ‘원수’요 ‘적’이라고 여긴 유 대협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셨어요. 그리고 유 대협에게 무술을 배우셨습니다. 자신의 스승이 사실은 ‘원수’요 친아버지임을 알고는, 뒤통수를 쇠몽둥이로 얻어맞은 것처럼 비틀거리신 분도 남궁 선생입니다. 부인은 그 분이 남궁세가에서 달아나 바깥 세상으로 나온 뒤, “나와 연아에게는 다정했던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들(특히 ‘남인南人’으로 불린, 남송의 유민들인 ‘남[南] 중국’의 한족[漢族]들)한테는 가혹하고 잔인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은 뒤, 마음속으로 갈등하셨다는 점도 헤아려 주셨어야 했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마음대로 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마음)을 내다 버릴 수도 없었던 분한테 “너는 왜 네 ‘원수’이자, ‘스승’이신 분을 ‘아버지’로 부르지 않느냐? 어째서 그 분을 ‘사랑’하지 않는 거야?”하고 따지신 건 너무 잔인한 일이란 말입니다.

남궁 선생이 ‘친아버지지만 자신이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고, 자신을 키우지도 못한 분’(유 대협)과, ‘비록 의붓아버지지만, 자신을 “아들”로 받아들였고,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사랑을 베풀면서 키우신 분’(남궁 ‘대인’) 가운데 누굴 ‘아버지’로 부르셔야 합니까? 때로는 키운 정이 낳은 정(아니 ‘만든 정[情]’)보다 더 중요한 법입니다. 그걸 이해해 주시옵소서.

다만, 소생(小生)은 남궁 선생이 유 대협을 ‘은공(恩公)’이자 스승으로 받들고, 그에 따라 예(禮)를 갖추셔야 했다는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그건 당연히 선생이 하셨어야 할 일이지요. 만약 부인이 선생에게 “너는 왜 유 아저씨(유 대협/자하랑)한테 예의를 갖추지 않았니? 왜 원한만 품고 있어? 그 분은 너를 구해 주셨잖아? 너한테 검술을 가르쳐 주셨잖아? 너를 망향단으로 데려가서 지켜 주셨잖아? 네 검에 죽음으로써 ‘죄’를 갚으려고 하셨잖아? 네 ‘원한’만 생각하고, 그런 것들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니?”하고 따지셨다면, 소생은 1각(刻)도 망설이지 않고 그 말씀에 동의하며 맞장구를 쳤을 것입니다.

부인은 소생이 지금까지 적은 것만 읽으셔도 충분히 노하시겠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쓴소리’를 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붓을 들어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노하십시오. 소생을 비난하고, 소생한테 반발하고, 소생을 꾸짖으십시오. 입을 다물고 끝까지 듣겠습니다.

하지만 소생은 이 서신에서 한 글자도 삭제하지 않을 것이며, 이 서신에 적은 생각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부정하지 않을 것임을 뚜렷하게 밝힙니다.

사실, 오래 전의 일이고, 부인과 선생이 맺어지기 전에 일어난 일이며, 두 분한테는 너무 민감한 일인지라, 이 서신을 쓰면서도, ‘이 서신을 쓰는 일이 “긁어 부스럼”이고, “다친 데에 소금을 뿌리는 일”인 건 아닐까?’하고 생각하며 머뭇거렸습니다만, 그래도 지적해 드릴 건 지적해 드려야겠기에, 무례를 무릅쓰고 붓을 든 겁니다. 부디 소생을 너무 원망하지는 말아 주시옵소서.

이제는 더 이상 쓸 것이 없어서, 이만 줄이고자 합니다. 붓을 놀리는 일이 사람한테 상처를 입히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말로 입은 상처는, 칼로 입은 상처보다 크다.”는 대식국(大食國) 속담을 알기에, 이 서신을 쓰는 내내 괴로웠습니다.

이 서신을 태우건, 답신을 쓰시건, 아니면 그냥 보관하며 부군(남궁 선생)에게 읽어 주시건, 그건 부인 뜻대로 하세요. 이 죄인은 부인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허리 숙여 인사하고, 이 서신을 바칩니다.”

- 무술년(단기 4351년) 음력 2월 15일에, 고리(高麗)의 경기도 한구석에서, 고리 사람이자, 백면서생인 돌베개가 드림

※덧붙이는 글(추신) :

비록 소생이 서신 본문에서 부인이 선생한테 하신 말씀이 적절하지 못했다고 썼지만, 그렇다고 부인을 미워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소생은 부인이 ‘몽고’제국(정식 국호가 ‘몽<골>’이지만, 굳이 ‘몽<고>’라는 이름을 쓰는 까닭은, 고리[高麗]나, 다이 비엣[대월大越] 제국이나, 따리[대리大理] 왕국이나, 마자파힛 왕국이나, 뵈[티베트의 정식 국호]나, 마자르 왕국이나, 키예프 루시나, 맘룩[맘루크] 왕조처럼 테무친한테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나라들을 짓밟은 몽골 군사들에게 품은 반감을 드러내고 싶어서고, 나아가 조갑제 전 『월간조선』편집국장이나 일본 우익들이나 미국의 자본가/학자들처럼 테무친과 몽골군이 한 짓을 구실삼아 자신들의 군국주의/침략전쟁/정복/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자들에게 반대한다는 것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싶기 때문입니다)의 원(元)나라로 끌려간 고리 사람들에게서 태어나셨고, 부인의 어버이가 원나라의 형벌을 받고 유배지로 끌려가 그곳에서 돌아가셨는데도, 그 일을 친원파(부원배/‘한간[漢奸]’)의 손자인 선생에게 따지지 않고, 오히려 선생을 가르치고, 이끌고, 선생의 마음과 정신을 지켜 주신 것을 보고, 부인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부인이 하신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소생이 부인처럼 ‘적국을 도운 사람의 자손’을 만났다면, 과연 냉정하게 굴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 없네요. 아마 분노를 터뜨리고 화를 냈겠죠. 그러니 부인이 소생과는 달리 훌륭하신 분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소생의 속 좁음과 이기심이 드러나, 그저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리고 부인이 선생에게 유 대협의 진실을 말하고, 어떻게든 유 대협과 화해하라고 권하신 것은 (비록 선생이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고 여기셨지만) 옳은 일입니다. ‘원수’가 친아버지인 줄을 모르고 있었다고 해서, 친아버지에게 검을 겨누려고 한 일이 ‘옳은 일’이나,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느낌과 마음과 충동과 원한을 떠나, ‘원칙’만으로 따진다면, 부인이 하신 일은 옳은 일이지요. 선생이 부인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입니다. 달리 말씀드릴 것이 없네요.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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